아이디    ID저장
비밀번호     








  
   
  성격의 발전
  연구과 (산상설교) - 5 과
'성격'이라는 희랍어는 원래가 조각을 위한 도구 혹은 도장을 의미하였습니다. 이 단어는 신약성서에서 오직 한 번밖에 쓰여지지 않았는데 그리스도에 대해서 쓰여졌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성품)이시라. (히 1:3)
오늘날 성격이란 단어는 한사람의 도덕적 견고성이나 윤리적 결단성을 의미합니다. 한 사람의 성격은 그 사람의 품위를 결정하고 시험을 당했을 때에 그가 취하게 될 태도를 결정해 줍니다. 강력한 성격의 발전은 행복한 생활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 되는 까닭에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성격의 형성을 위해서 그리스도에게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 하나의 역설
성격의 발전이란 문제를 취급할 때에 우리는 매력적인 사람이 반드시 윤리적으로 결함이 없는 사람은 아니라고 하는 명백한 역설에 직면하게 됩니다. 남성에 대한 잘못된 생각이 최근에 범람하고 있습니다. 계집애 같이 나약한 남자가 아니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남성이 되려고 하면 범죄행위를 두려워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요사이 광고나 인기 있는 텔레비전의 배우들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생각으로 인해서 수많은 대학생들이 군중 속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이 완전히 성숙했다는 사실을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그들이 배운 범죄행위를 마음껏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어느 청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대학에 오기 전만 해도 결코 술을 마신 일이 없었습니다. 그때 나는 충실한 소년단원이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자기의 천진난만한 과거를 경멸하면서 말했습니다. 그가 한가지 깨닫지 못한 사실이 있습니다. 즉, 자기에게 주어진 유혹에 항거할 수 있는 힘이 너무도 미약했다는 사실입니다. 강한 성격을 소유한 남성들처럼 그러한 유혹에 항거하는 대신에 그는 거기에 굴복 당하고 만 것입니다. 도덕에 대한 일반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사회는 도덕의 존재여부는 사회구성원의 도덕적 성실성에 의존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회는 범죄행위를 소탕하고 범죄자에게 형벌을 가하기 위해서 법률을 제정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진퇴양난에 빠지게 됩니다. 부모들은 그들의 자녀가 도덕적 성실성을 지닌 남성 혹은, 여성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녀들이 너무 얌전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어떤 부모들은 하나의 불행한 해결책으로 그들의 자녀가 조금씩은 과오를 범하도록 묵인해 주고 있습니다. 도덕적 성격과 용맹성이 함께 공존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데에는 두 가지의 이유가 있습니다. 이들 중 첫 번째, 이유는 감수성과 무기력함의 동일성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감수성이 예민한 것은 실제로 남성적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생각은 제 3장에서 이미 논의된 바 있는 "사나이가 울면 못써" 하는 태도를 가져오게 합니다. 또한 이러한 태도는 남자가 시나 예술이나 종교에 탐닉하는 것은 남자답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을 가져오게 합니다. 이처럼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남자가 술을 마시거나 혹은 여러 가지 부도덕한 생활에 빠짐으로써 자기의 남성적인 기질을 키워 보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문화가 감수성에 예민한 사람들을 경멸함으로써 여러 가지 성취의 가능성마저 매장시켜 버렸다는 것은 불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감상적이고 나약한 사람과 실제로 훌륭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 정서적인 사람을 조심스럽게 분간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의 두 번째 이유는 사람들의 대다수가 순수한 행위보다 어느 법칙의 예외를 더 주목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문제를 더 분명하게 관찰하기 위해서 우리는 부도덕한 사람들의 대부분이 칭찬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욕망에 의해서 사로잡힌 나약한 인간들입니다. 그들은 속이고 거짓말하고 훔치며 거룩한 사물에 대한 경이의 감정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텔레비전이나 영화를 통해서 보여진 인기배우들의 연기로 인해서 그들 자신의 부도덕한 행위가 그들에게 남성적인 기질을 키워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엄격하게 도덕을 준수하면서도 강력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사실상 성격이 강직한 사람들은 대부분이 도덕을 준수하는 사람들이고 부도덕한 사람의 대부분은 나약한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너무 착한 인간이 될까봐 두려워하는 마음의 근저에는 강한 성격의 소유자가 되고 싶어하는 갈망이 숨어 있습니다. 남성적인 성격을 키워주는 비결이 바로 여기에 나타난 예수의 교훈 속에 들어 있습니다. 예수는 '강한 성격은 어떠한 외적행위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행위를 결단하는 능력에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오해한 것은 바로 이 위대한 진리입니다. 외적인 현상에 그들의 관심을 집중시킴으로써 그들은 율법 속에 내재하고 있는 위대한 힘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위선을 책망하시기 전에 예수는 모세의 율법에 대한 자기의 태도를 밝히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함이로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7-18)

예수의 비평은 모세의 율법에 관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해석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율법 그 자체는 율법적인 바리새인들에 의해서 전적으로 무시된 영적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롬 7:14)

예수는 사람들에게 더 높은 도덕적 차원 즉, 아버지의 사랑을 요구하심으로써 율법을 완전히 성취하셨습니다.

◑ 작은 일들의 중요성
성격의 발전에 관한 예수의 태도는 작은 일들에 대한 그의 태도에서 가장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는 모세의 율법을 하나의 거룩한 약속으로 보고 율법의 어느 한 곳도 소홀히 취급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마 5:19)

다음 성구는 유대교의 율법주의자들이 신봉하는 거짓된 종교에 대한 더 가혹한 정죄가 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서기관과 바리새인 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

이러한 성구들을 보건대 바리새인들이 정죄를 받은 것은 그들이 율법의 작은 부분을 행치 않고 내버려둔 때문이라는 사실과 예수가 그의 제자들에게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율법을 더욱 완전하게 지키도록 부탁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의 다른 교훈을 분석해 보면 이것이 과거에 예수가 말씀하셨던 것과 정반대가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종교는 율법의 작은 것을 지키려고 한 까닭에 더 중요한 문제들을 간과해 버렸던 것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 지니라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 도다.(마 23:23-24)

예수가 여기서 강조하신 요점은 올바른 영적 태도가 내재할 때에 외적행위는 결과적으로 따라오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와는 정반대의 견해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세부적인 형식을 지킬 때에 선한 마음이 생겨난다고 주장했습니다.

예수의 교훈이 지니고 있는 뚜렷한 특징은 그가 한번도 행위의 외적인 법칙에 관해 말씀하신 바가 없으며 그의 도덕적인 교훈은 언제나 내적인 태도에 관한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교육프로그램이 바리새인들의 원칙을 따라서 작성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수많은 성경반에서는 오직 외적인 행위의 법칙에만 관심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거기서는 무엇 무엇을 하라 무엇 무엇을 하지 말라는 것만 가르치고 배웁니다. 이러한 교육의 결과는 청년들로 하여금 자기의 행위를 지혜롭게 규제하고 있는 강력한 성격형성에 지장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예수는 한 사람을 변화시키는 오직 하나의 방법은 그의 태도를 변화시키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대학생들은 강력한 성격이 요구되는 상황 속에서 그들을 이끌어 줄 강력한 내적 태도를 배운 일이 없기 때문에 그들의 신앙을 상실해 가고 있습니다. 부모와 교회가 요구하는 행위의 속박에서 벗어난 그들은 자기가 새로 가지게 된 자유를 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는 내적 성격을 갖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가 가르치신 교훈은 우리가 강력한 성격을 키워 나간다면 우리의 행위는 도덕적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자기성격의 발전을 무시한다면 그는 자기의 신앙생활이 실패로 끝나게 되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착한 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이들이 착한 것은 정의와 자비와 믿음에 의해서 철저하게 영감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자기가 나쁘게 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성격으로는 언젠가 한번은 직면하게 될 무서운 시험을 극복해 낼 수 있는 힘을 배양할 수가 없습니다.

◑ 작은 일들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살인, 간음, 도둑질 등의 큰 죄는 짓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일상생활을 통해서 직면하는 사소한 일들 때문에 도덕적인 시련을 겪는 것입니다. 예수는 강력한 도덕적 성격의 발전이 이처럼 작은 일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는 분노가 살인의 씨를 뿌리고 음탕한 마음이 간음죄로 번진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는 비극적 결과를 초래하게 될 마음의 태도에 깊은 관심을 두셨습니다. 진실성에 관한 그의 교훈 속에서 그 예를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오직 너희 말은 옳다옳다 아니라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마 5:34-37)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여기서 예수가 맹세하는 것은 죄가 된다고 가르치신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직도 예수의 교훈이 맹세를 금지하기 때문에 법정에서도 맹세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기서 중죄를 당한 마음의 태도를 조심스럽게 살펴본다면 사실상 예수가 어떠한 형태로든지 거짓된 마음을 갖지 말도록 경계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맹세를 소홀히 취급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예수는 마태복음 23:16-22에서 이 사실로 인해서 그들을 엄중히 책망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구라도 성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은 믿을 바가 못된다. 그러나 성전에 놓인 금을 두고 맹세한다면 그것은 믿을 만하다.

예수가 엄중히 견책하신 것은 진리에 대한 이와 같은 태도였습니다. 한 사람의 말은 비록 맹세를 한 것이 아니라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맹세를 통해서 자기 말의 진실성을 보증해야 할 정도라면 그 사람의 말은 얼마나 무가치합니까? 예수가 정죄 하신 맹세가 필요하게 된 것은 이러한 나쁜 태도였습니다. 비록 오늘날에 있어서는 사람들이 별로 맹세를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허위로 가득한 태도가 이 세상에 범람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태도란 것은 경우에 따라서 진리에 대한 여러 가지의 표준을 갖는 태도입니다. '새빨간 거짓말' 이란 것은 예수가 바리새인들을 정죄 하신 것과 똑같은 비행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어느 교회 신자들의 태도를 예로 든다면 정치나 혹은 경제활동에 있어서는 정당한 것이 다른 각도에서 볼 때는 잘못이 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장사는 장사야" 라고 말함으로서 자기의 부당한 거래를 합리화 시키려는 사람은 바리새인들이 범한 태도와 똑같은 잘못을 범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진실성을 가르칠 수 있을까요? 그들에게 올바른 본을 보여줄 때에 이것이 가능할 것입니다. 어린이들은 참된 것을 말하도록 가르침을 받아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많은 어린이들은 너무 정직한 말을 하기 때문에 때로는 그 부모들을 당황케 만드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때때로 부모들은 자녀들이 너무 정직한 말을 하지 않기를 바랄 때가 있습니다. 어린이가 사회에서는 너무 대담한 진리가 때로는 잔인한 결과를 가져와 결과적으로 그것이 부정직한 것이 된다는 것을 배울 필요는 있습니다만 진리를 주입식으로 배울 수는 없습니다. 그는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의 생활 속에 나타난 태도로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어머니가 자녀한테 자기를 찾아온 방문객에게 가서 자기가 집에 없다고 이르도록 시킨다면 그것은 어린이의 진리에 대한 경이감을 완전히 말살시켜 버리는 결과를 가져 올 것입니다. 어린이에게 강한 성격을 키워주기 위해서는 부모가 위에서 공부한 예수의 교훈을 늘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1) 참된 힘은 외적인 행동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내적인 성향(기질)에 있다. 강한 성격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부도덕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진정한 힘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
2) 올바른 교육은 행위의 외적형태가 아니라 내적 태도의 발전에 중점을 둔다. 지혜로운 부모는 그의 자녀가 자기의 가정과 가족생활의 구속에서 벗어났을 때에도 자기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강한 성격을 교육에 의해서 지니게 해 준다는 것을 안다.
3) 마지막으로 부모는 바른 태도를 가르치는 최선의 방법은 그들 자신의 생활 가운데서 모범을 보여주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페이지 설정에서 여백 크기 조절 후 인쇄하세요.
   

BCC 소개 | 뉴스레터 | 찾아오시는 길 | 개인정보 보호정책 | TOP ▲
BCC | 서울시 강서구 방화1동 180-14 7F | 비영리법인번호:109-82-03052 | Tel (02) 2662-0793, 2662-8081 | Fax (02) 2662-8082
Portions are Copyrighted 1964-2026 BCC. Contact us for more inform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