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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구과 (산상설교) - 1 과
유명한 마술사 이야기를 아십니까? 어린이들은 마술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만들어 낸다는 이야기를 즐겨 듣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마술사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놀라운 사건들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자연의 잠재적 힘을 개발하고 이용하므로서 수많은 업적을 남겨 놓았습니다.

과학의 발달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종교에서 점차 멀어져 가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과학과 종교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학자가 지나쳐 버리거나 심지어 부정해 버리는 일이 없지 않지만 과학과 종교 사이에는 확실히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 과학과 종교
첫째 과학자는 우주가 질서정연한 것이라고 전제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주에 질서가 없다면 도대체 예측은 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음에 생겨날 일들을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별들의 운행에는 질서가 있어 천문학자들이 일식을 예언할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이 종교와 아무런 관련이 없을까요? 이것은 자연법칙에 의해서 우주를 다스리고 계신 하나님이 만유인력의 법칙이나 별의 운행 법칙과 마찬가지로 불변하고도 확실한 법칙에 의해서 영적 세계까지도 다스리고 계심을 의미하지 않겠습니까? 예수의 교훈이 틀리지 않는다면 믿음과 사랑은 자연과학에서 발견된 어떠한 힘에도 필적할 수 있는 위대한 정신력이 될 것입니다. 만유인력의 법칙은 그것을 부정해 버린다고 해서 실제로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천국과 지옥을 부정하더라도 믿음과 사랑의 법칙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과학의 두 번째 확신은 진정한 묘사란 여러 가지 사실들에 대하여 가장 근사하게 일치되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원자를 본 과학자는 아직 아무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의 실험실에서 연구한 과학적 현상들을 설명하기 위해 원자들의 존재를 확신합니다. 원자에 대한 가정 없이는 자연의 힘을 파헤쳐 낼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은 원리가 종교에서도 적용이 됩니다. 과거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서 몇 가지 증거를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우리의 감각적 오관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설명하는 논리적 증명들을 자세하게 살펴본다면 그 가운데 대부분은 하나님을 믿음으로만 우주의 존재와 세계의 모든 현상과 인간의 도덕적 양심과 하나님께 대한 우리들의 관념 자체까지도 설명되어질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과학은 또 하나의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하나의 현상 가운데 아무리 작은 부분이라도 그 나머지의 힘 전체에 관한 진리를 나타내어 준다는 사실입니다. 만유인력의 법칙이 적용될 수 있는 모든 경우를 낱낱이 조사해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과학은 몇 가지의 경우를 실험함으로서 자연 일반에 관한 진리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법칙이 종교에서도 적용이 됩니다. 대체로 우리들의 태도가 우리들의 정신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것은 태도가 정신적 생활의 전부를 의미한다는 말이 아니고 우리의 태도가 건전하다면 우리가 우주의 정신적 법칙에 따라서 살고 있는지의 여부를 가르쳐 준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이 선하다면 정신적 건강은 분명히 그의 정신적 법칙에 순종함으로 얻어진 축복의 하나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주를 명해서 불행과 정신적 혼돈을 가져오게 하셨다고 믿기 어렵습니다. 예수는 행복이 신앙생활에 의해 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아직도 지극히 불행한 신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사실은 기독교의 패배를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으면 예수의 교훈이 지니고 있는 변화의 능력이 이 사람들의 생활에서 간과되어 버린 것일까요? 분명히 후자가 옳을 것입니다.

◑ 과오를 범한 종교교육
잘못된 태도에 대한 책임의 일부는 종교교육의 빈약한 내용에 있다고 보겠습니다. 종교교육이라면 무조건 건전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잘못된 종교교육의 한가지 예를 든다면 너희는......을 해서는 안된다는 식의 교육 방식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종교의 주된 기능이 사람이 해서는 안될 일을 가르치는 것이며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한 주된 동기는 수치감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의 교훈과는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배우기 위해서 산상수훈만 연구해 보아도 충분할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부정적 도덕률과는 정반대로 예수는 행복과 풍요한 삶을 가져오기 위한 적극적 도덕률을 가르치셨습니다.

종교교육이 범하기 쉬운 두 번째 과오는 종교적 사건들을 가르쳐 주기만 하는 태도입니다. 이러한 방식의 교육은 성경에 관한 역사적, 지리적 사실들에 대한 지식이 자동적으로 종교적, 및 도덕적 행위를 낳게 해줄 것이라는 확신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타당하다고 볼 수 있는 증거는 하나도 없습니다.

교육의 세 번째 방식은 많은 수효와 거대한 행사에만 정력을 쏟는 태도입니다. 이러한 태도의 주된 동기는 교회에 대한 충성심과 위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거슬리게 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입니다. 이 말은 수효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각기 영혼을 지니고 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강조하려는 점은 많은 사람들의 집단에 대해서만 종교교육을 시행하려는 태도는 불건전하다는 사실입니다.

종교교육의 네 번째 형태는 일상생활의 문제를 전혀 무시해 버리는 태도입니다. 사람들은 고차원적인 성구에 의해서 도움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추상적인 관념론이나 아름답게 꾸며진 수식어로 가득한 설교에 의해서 감동을 받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아니 합니다.

성경공부반의 지도자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성경공부반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능력과 이해 정도가 모두 다르기 때문에 반응도 다양하다는 점입니다. 예수는 이것을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해서 가르치셨습니다(마13:1-9). 세상에는 언제나 삼십배, 육십배, 그리고 백배의 결실을 맺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각자 고유한 능력과 소질을 타고나기 때문에 저마다 그 자신의 방식을 따라서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 안에서 사는 방법을 배우기 시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재빨리 자기의 타고난 능력과 성향이 어떠한 방법으로라도 고쳐져야 한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한 사람의 교육은 실제로 그의 성향과 충동과 능력이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가를 찾아내는 노력입니다. 대체로 사람은 자기에게 만족을 가져다 주는 습관을 배우게 됩니다. 어린아이가 성숙함에 따라서 그는 자기의 가치관과 좋고 싫음, 두려움, 그리고 성냄과 사랑의 능력을 키워 나갑니다. 그의 사회생활에 있어서 하나의 충동이 즉각적인 만족을 가져다 주지 못할 때에는 감정이 나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한 사람이 굶주리고 있을 때에 아무 음식도 구할 수가 없다고 믿게 되면 그는 공포에 쌓이게 됩니다. 혹은 그가 음식은 구했으나 어떤 사람이 그것을 빼앗아 갈 때에는 분한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충동이 만족되면 감정은 평안해 집니다. 세상에 대한 이러한 반응을 일반적으로 인간의 "정서적 태도"라고 합니다. 개인의 인격과 정신의 건강은 그가 키워 가는 정서적 태도에 의존합니다. 모든 사람의 정서적 태도가 다 건전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의 정서적 태도는 불건전합니다. 또 어떤 이는 건전합니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일은 이러한 정서적 태도가 유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각 사람은 경험에 의해서 자기의 정서적 태도를 키워 나갑니다. 그는 자기의 정서적 태도를 변화시킬 수가 있습니다.

정서적 태도가 변화되어야 할 까닭이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어떤 이의 정서적 태도는 불행만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그의 정서적 태도가 하나님의 계시된 뜻과 조화되지 않는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 조화와 갈등의 근원
사람의 몸은 기계와 마찬가지로 조화가 아니면 갈등 속에서 움직여지는 하나의 기계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정신도 조화 속에서 움직여 질 수가 있습니다. 단지 그것은 내적 갈등 속에서 움직여집니다. 비록 우리가 정신적 질환을 가져오는 극단적 태도를 찾아 낼 수 있더라도 정신적 태도에 있어서 조화의 상실을 찾아내기는 더욱 어려울 것입니다. 사람은 대체로 그의 내적 갈등, 혹은 조화의 정도와 성격에 따라서 세 가지의 인격으로 분류 할 수 있습니다.

소위 정신병자가 첫 번째, 부류에 속합니다. 이 사람은 자기의 모든 본능적 충동을 가장 원시적인 방법으로 충족시키려고 합니다. 그의 생활 방식은 '나는 그것을 필요로 할 때에 내가 필요로 하는 그것을 갖는다' 그의 인격은 순간의 감정에 의해서 지배를 받습니다. 그는 자기의 생애에 있어서 아무런 목적도 없으며 그가 성취하려는 것은 결코 실현되는 일이 없습니다. 이것은 불행을 가져옵니다.

이와 정반대로 금욕적 인격이 있습니다. '너는 ......을 해서는 안된다' 고 하는 부정적 도덕률에 의해서만 교육을 받은 어린아이는 그의 모든 충동과 욕구에 대해서 죄책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는 자기의 충동과 욕구를 부끄럽게 생각해서 그 모든 것들을 거부해 버립니다. 비록 이러한 사람이 자기의 충동을 의식적으로 몰아 내었다고 하더라도 그는 이것들을 완전히 몰아 낸 것은 아닙니다. 좌절감과 불행감의 형태로 혹은 다른 종류의 형태로 이러한 충동을 나타낼 것입니다.

인간의 심리학을 연구하는 많은 사람들이 행복의 조건으로 타인을 위한 중심적 목표의 설정을 주장합니다. 일생 동안 자기를 위해서만 목표를 설정하는 사람은 결코 행복을 찾지 못 할 것입니다. 예수의 교훈에 비추어 보더라도 이것은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우리는 일생을 통해 하나의 지배적인 목표를 가질 뿐만 아니라 이 목표가 자기의 능력과 일치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목표란 것은 자기의 모든 능력을 활용 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의 능력을 신뢰해야 하고 자기가 종사하고 있는 일의 가치를 인식해야 하며 사회의 중요성을 믿어야 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예수가 그의 교훈을 통해서 강조하신 태도입니다. 건전한 인격이라 하더라도 잘못된 정서적 태도로 인해서 파멸 당할 수가 있습니다. 만일 개인이 한없는 욕망을 가지고 그것으로 자기의 삶을 다스리게 된다면 그의 정신적인 상태는 극단적인 불행 속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만일 심리학자가 불행의 두 가지 원인을 지적한다면 아마 공포와 분노를 들것입니다. 이 두 가지의 감정에 대하여 그토록 많이 언급한 것은 참으로 중요한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 믿음과 사랑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과거의 어느 누구보다도 사람들을 더 잘 이해하셨습니다. 그의 신성을 부인하는 사람들까지도 그의 교훈을 예찬합니다. 불행히도 많은 사람들이 그의 교훈을 아름다운 시의 구절로만 생각하고 그것이 고상하고 도덕적인 내용이기는 하나 비현실적이고 너무나 이상적인 것이라고만 생각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의 교훈을 피상적으로만 해석하기 때문에 그것이 지니고 있는 깊은 뜻을 놓쳐 버리고 맙니다.

믿음을 가지라고 하신 예수의 교훈을 생각해 봅시다. 거의 모든 종교가 신앙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거기에 새롭고도 깊은 뜻을 부여하셨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신앙은 단순히 지적 동의만을 의미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가 요구하신 믿음은 역사적 사실로 받아 드려 질 수 있는 신앙이 아닙니다. 또한 그가 말씀하신 신앙은 무식한 사람의 맹목적인 미신이나 무비판적인 신앙이 아닙니다. 이러한 종류의 신앙은 그들의 고유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나 이것이 예수가 가르치신 신앙은 아닙니다. 예수는 풍요한 삶의 필수적 조건으로서 신앙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는 자기의 권위로서만 복종을 강요하신 것이 아닙니다. 진실로 그의 청중들을 놀라게 한 사실들 가운데 하나는 그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처럼 옛 권위를 가지고 도전하신 것이 아니라 우주적 경험에 의해서 호소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가르치신 교훈의 권위는 그 교훈 자체가 우리에게 행복과 기쁨을 가져다 준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산상수훈의 윤리적 계명을 주목해 봅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아니 하려거든 비판하지 마라.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주시리라 예수가 이러한 것들을 요구하신 것은 그것이 의무이기 때문이 아니요 그것이 옳기 때문만도 아니었습니다. 그의 호소는 이러한 것들이 현실과 내세에 있어서 행복과 풍요한 삶을 가져다 준다는 사실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예수는 또한 사랑이 영적 능력의 커다란 원천이 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사랑에 대해서도 신앙과 마찬가지로 오해를 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사랑은 여러 가지의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희랍어에는 사랑에 해당하는 단어가 몇 가지 있으나 우리말에는 '사랑' 이라고 하는 하나의 단어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 이라는 용어는 예수가 가르치신 뜻을 나타내려고 사용합니다만 그것이 정확한 용어는 아닙니다. '형제의 사랑' 이라는 용어도 예수가 가르치신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해 왔으나 형제애가 의미하는 뜻은 일반적으로 통일되어 있지 아니합니다. 예수가 가르치신 사랑의 개념을 오해함으로서 그의 계명 전체를 오해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다른 쪽 뺨을 돌려 대는 것을 비겁한 사람의 소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있어 악을 선으로 갚고 악한 자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형제애도 예수가 가르치신 교훈에 정확한 뜻을 설명하지는 못합니다.

◑ 아버지의 사랑
이러한 교훈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형제의 사랑이 아니라 예수가 가르치신 아버지의 사랑을 이해해야 합니다. 아버지가 자기의 아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남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러한 계명이 실제로 어떠한 변화를 가져오는지 살펴봅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계명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자기에게 반역한 압살롬을 사랑했다고 해서 이것을 비정상적인 행위라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아들을 위해서 자기의 뺨을 수백 번 이라도 돌려 대지 아니 할 아버지가 어디 있겠습니까? 타락한 자식을 위해서 기도를 드리지 아니할 부모가 어디 있을까요? 심지어 자기들을 저주하는 자식들을 위해서도 축복을 비는 부모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자식들이 아무리 무정하더라도 아버지는 그들을 사랑하며 그들의 악을 선으로 인도하려고 합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공포와 분노를 없앱니다. 분노는 자식에 대한 부모의 태도가 아니며 부모들은 그들의 자식을 사랑하는 까닭에 그들 자신의 안전을 위한 모든 공포를 제거해 주어야 합니다. 어머니는 자기의 안전을 고려하지도 않고 잠자고 있는 아기를 구하려고 불타고 있는 건물 속으로 뛰어 들어갑니다. 심리학적 견지에서 볼 때 그리스도인이 타인에 대하여 취할 수 있는 태도 가운데 산상수훈을 통해서 예수가 가르치신 아버지의 사랑보다 더 건전한 것은 없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사람에 대하여 아버지다운 태도를 취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이 말의 진정한 뜻은 그리스도인들이 타인에 대하여 취할 수 있는 적절한 태도를 배우기 위해서 예수의 교훈, 특히 그의 산상수훈을 연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타인을 사랑하므로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완전하심과 같이 우리도 완전해져야 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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