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내는 사람은 누구나 궁지에 빠진다." 이 한 구절은 분노에 대한 예수의 교훈을 완전하게 요약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는 행복의 조건으로 분노의 극복을 제시하셨습니다.
예수는 인간의 여러 가지 감정 중에서도 특히 공포와 분노를 중요하게 취급하셨습니다. 그는 예를 들면서 분노의 감정을 이겨내기 위해 우리가 지녀야 할 태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스트리크닌" 이라고 하는 화학품이 의학상 필요할 때가 있는 것처럼 분노도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관습이 될 수는 없습니다. 분노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진정한 행복을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가 분노에 관해서 길게 말씀하실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라.” (마 5:21-22)
살인을 정죄하는 율법이 수천 년 동안 지배해 왔으나 아직도 살인사건이 횡행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살인이 결과에 불과하고 그 원인은 분노에 있음을 명백히 지적하셨습니다. 우리가 살인을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먼저 분노와 증오의 감정을 이겨내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의 교훈을 다음과 같이 바꾸어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의 형제에게 분노를 품고 그를 죽이려고 마음먹는 자는 그의 마음속에 이미 살인한 것이다."
앞에서 인용된 성구에서 예수는 살인을 분석하셨습니다. 먼저 형제에게 성을 냅니다. 그리고는 경멸의 뜻으로 그에게 '라가'라고 합니다. 그의 분노가 더욱 커져서 드디어는 그의 형제에게 "이 어리석은 자야!" 하고 비웃게 됩니다. 이 말은 유대인 풍속에 의하면 지금보다 훨씬 더 모욕적인 뜻을 내포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죄악의 욕설이었습니다. 이 모든 행위가 결국에 가서는 살인을 하는데 까지 이르게 됩니다.
우리가 살인을 방지하려면 문제의 핵심을 분석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는 그의 독자적인 방법으로 살인의 원인이 되는 마음의 상태에 집중적으로 문제점을 제기하셨습니다. 외적행위는 제 이차적인 문제였습니다.
분노가 신체에 미치는 영향은 공포의 그것과 동일합니다. 분노의 감정을 이겨내기 위해서 우리는 단순히 외적 행동에 자제를 가하는 것만 가지고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분노로 인해 감정이 격동하면서도 겉으로는 평정을 유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분노의 외적표현에 규제를 가함으로서 이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것은 마치 부스럼의 껍데기를 없애 버림으로 그 상처를 낫게 하려는 시도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문제의 핵심, 즉 분노 그 자체를 해소시켜 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분노의 원인이 되는 환경을 다른 방향으로 개선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분노와 공포의 감정을 몰아내고 사랑과 신뢰의 감정을 불어 넣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다음 성구에서 예수는 문제의 핵심을 파헤치고 그의 제자들에게 사랑으로 분노의 감정을 이겨내도록 권면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만일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그것은 정당하거나 정당하지 않거나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가 하신 말씀은 '만일 네가 네 형제에게 원망할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이 아니고 만일 '네 형제가 네게 분노를 품고 있거든' 이라는 것입니다. 편협한 사람은 형제가 분노를 품으면 자기도 그와 같이 대응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를 초월하는 새로운 의를 가르치셨습니다.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이제는 동물을 잡아서 제단에 갖다 바치는 형식의 제사가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현대생활에 적용시킬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마음의 정죄를 하지 않고 매주 베풀어지는 주의 만찬에 참석합니다. 오늘날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즉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기 전에는 만찬을 위한 식탁에 나오지 말라' 고 말입니다. 주의 만찬은 생전에 자기를 미워하고 성내던 사람들을 위해서 생명까지도 바치신 주님의 행적을 기념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한 사람의 형제 정도는 능히 용서해 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주의 만찬을 베풀기 전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피차 사랑하고 자기를 미워하던 사람과 화해를 하게 된다면 교회의 영향력은 얼마나 강대해지겠습니까?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가 성을 내면서도 그것은 '정당한 분노'라고 말함으로서 자기의 행위를 변호하려고 합니다. 정당한 분노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실상 예수는 때때로 정당한 분노를 발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분노를 어떻게 나타내야 하는가 하는 실례도 보여 주셨습니다. 아마도 그가 정당한 분노를 가장 훌륭하게 나타내신 일은 최후의 만찬 때일 것입니다. 손님에게 수건과 세숫대야를 갖다 드리는 것이 그 당시의 관습이었습니다. 혹 그 주인이 부자일 때는 자기의 종으로 하여금 손님의 발을 씻어주게 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이 맨발로 혹은 샌들을 신고 먼 길을 여행하게 되면 저절로 발이 더러워 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최후의 만찬 때 제자들은 하늘나라에서는 그 가운데 있는 사람들 중에서 누가 제일 큰 사람이 될 것인가 하는 문제로 인해서 다투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각자가 발 씻는 그릇을 외면하였을 것입니다. 예수가 정당한 분노를 나타내신 것은 바로 이런 때였습니다. 그는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이때 그의 제자들이 당했던 수치감은 이루 형언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인색한 태도에 대하여 이보다 더 효과적인 질책의 방법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그의 가슴속에는 완전무결한 사랑의 감정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한마디의 질책도 없었습니다. 그의 제자들은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전부가 사랑의 치유능력을 실감했습니다.
예수의 원칙은 악을 선으로 갚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칙을 그의 생활 속에서 적용하셨습니다. 너를 송사 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고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마 5:25-26)
예수가 여기서 묘사하신 장면은 그 당시에 보편적인 현상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원고와 피고가 함께 법정으로 걸어 들어가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상적인 희망은 그들이 길에서 피차 문제를 해결해 버림으로서 재판 받는 절차를 생략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러한 경우가 잘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함께 걸어가면서도 그들은 피차 상대방을 경멸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분노의 원인
심리학자들은 분노의 세 가지 원인을 지적합니다. (1) 다른 사람이 우리를 근거 없이 경멸하거나 과소평가 할 때 (2)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을 제지당했을 때 (3) 우리에게 가해진 실제적인, 혹은 상상적인 부당성, 예수는 이 세 가지의 태도를 계속해서 취급하셨습니다.
분노의 첫 번째 경우 부당한 피해로 인한 분노는 법정으로 가는 두 사람의 태도에서 볼 수 있습니다. 두 사람 가운데 어느 한쪽도 먼저 화해를 청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가 상대방에게 굴복 당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를 송사 하는 자와 급히 사화하라." 이것은 자기의 품위를 격하시키는 듯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노를 택하기보다는 훨씬 더 지혜로운 일입니다. 정당한 분노의 발로라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자기가 과오를 범했을 때 성내기를 잘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부당한 비판보다는 정당한 비판에 의해서 더 많이 성을 냅니다.
'타협한다'는 단어 속에는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깊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축어적으로 볼 때 그것은 '선량한 마음을 갖다' 혹은 '호의를 갖다'를 의미합니다. 예수가 권면 하신 것은 '비겁'이 아니고 '사랑'입니다. 우리가 성을 내게 되면 싸움에서 이기거나 지거나 결과는 하나 즉, 패배뿐입니다.
분노의 원인 가운데 또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실제적인 혹은 상상적인 부당성에 의한 분노입니다. 예수는 그러한 경우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치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마 5:38-39).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의 원칙은 별로 찬양할 만한 것이 못된다고 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윤리적 기준에 의하면 이것은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눈은 생명으로 이는 머리로"라고 하는 것이 그 당시의 지배적인 도덕적 명제였기 때문입니다. 분노가 행위의 지배적인 동기로 작용할 때에는 이러한 윤리가 단연코 득세할 것입니다. 주먹싸움을 하는 두 소년을 보십시오. 그들은 갈수록 상대방을 더 세게 때립니다. 분노는 이와 같습니다. 이때에는 "눈은 생명으로 이는 머리로"의 도덕률에 의해서 지배를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는 분노는 분노로 갚지 말고 비록 대가가 비싸더라도 증오를 사랑으로 갚으라고 그의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예수의 교훈은 참으로 흥미가 있습니다. 어느 사람이 맞게 되었을 때 그를 때리는 사람은 자기의 오른손으로 상대방의 왼쪽 뺨을 때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모욕할 때에는 그 당시의 풍습에 따라 자기의 오른쪽 손등으로 상대방의 오른쪽 뺨을 세게 쳤습니다. 예수가 말씀하신 것은 바로 이러한 장면일 것입니다.
예수는 우리가 왼쪽 뺨을 돌려대면 맞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가 말씀하신 것은 부당한 취급에 의한 분노를 이겨낼 수 있는 오직 하나의 길은 사랑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여기서 예수가 수동적인 저항을 권면 하신 것이라고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가 말씀하신 교훈의 정신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는 악을 이겨내는 유일의 무기는 사랑이라고 주장하셨기 때문입니다. 연좌데모에 가담하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그들을 부당하게 취급할 압제자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차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또 너를 송사 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마 5:40-42)
예수의 시대에는 로마의 점령군들이 어떠한 시민에게도 심부름을 보낼 권리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을 성나게 했습니다. 그들의 압제자인 로마인들에 의해서 그들의 생활이 규제 당해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세 번째의 분노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즉 자유를 빼앗긴 생활이 분노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저지당했을 때 성을 내기 마련입니다. 예수는 성을 내지 않는 비결은 사랑으로서 그러한 상황을 이겨내는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명령을 받았을 때에는 그 이상의 몫을 감당하십시오. 그리하면 당신은 그 싸움에서 이기는 자가 될 것입니다.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아마 가장 귀찮은 것은 습관적으로 꾸러 오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대체로 이런 사람에게는 성을 내면서 빌려주기를 거부할 것입니다. 그것이 보편적인 현상입니다. 그래서 결과 적으로 양쪽이 모두 성을 내기 마련입니다. 예수는 꾸러 온 사람의 요구는 반드시 들어주어야 하고 그가 요구하는 분량만큼 빌려줘야 한다고 말씀하시지는 않았습니다. 그가 말씀하신 의도는 꾸러 온 사람을 화나게 해서 돌려보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성애의 경우를 예로 들어봅시다. 어린이가 아버지께 와서 무엇을 요구하면 그는 주의 깊게, 그리고 참을성 있게 귀를 기울입니다. 그는 어린이에게 해로운 것이라고 생각되면 그 요구를 거절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어린이를 화나게 해서 돌려보내지 않습니다. 여기서 '거절하다'라고 번역된 동사는 아주 강한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어 쫓다'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아버지는 부탁을 거절하면서 그의 자식을 내어 쫓기까지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꾸러 온 자에게 거절해야 할 때에는 그를 내어 쫓을 것이 아니라 그에게 사랑에서 우러나온 태도로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모두가 유익한 일입니다.
분노에 대한 그의 결론에서 예수는 하나의 새로운 도덕률을 세우셨습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 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마 5:43-47)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불가능한 계명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놀라운 통찰력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아무리 타락하고 성품이 비뚤어진 자라도 자기의 친구만은 사랑할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하늘에 계신 그의 아버지를 닮고자 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보다는 그 차원이 좀 더 높아야 할 것입니다. 자기의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이상적 태도입니다.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러나 마땅히 해야 되는 일입니다. "원수"로 번역된 단어는 전쟁터에서의 적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단어의 참뜻은 "미움 받는 자" 입니다. 다른 말로 한다면 예수가 하신 말씀은 "너희가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원수의 행위를 미워하더라도 그 사람은 사랑해야 된다는 말을 듣습니다. 죄인은 사랑하되 죄를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루이스는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오랫동안 나는 이 말을 참으로 시시하게 생각해 왔었다. 어떻게 사람이 하는 행위는 미워하면서 그 사람만은 사랑할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몇 해가 지난 후에 나에게는 내 일생을 통해서 그러한 대상이 나타났다.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
이것은 예수가 가르치신 행복의 비결입니다. 악을 선으로 갚으십시오. 선으로서 악을 정복하십시오. 이러한 생활이야말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완전하심과 같이 우리 자신이 완전해 질 수 있는 첫 단계가 될 것입니다.(마 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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