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는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무서운 적 가운데 하나입니다. 심리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분노가 인격에 미치는 악영향이 크다 할지라도 그것은 공포에 의해서 일어나는 불행보다는 덜 심각하다고 합니다. 인간은 자기가 의식하거나 하지 못하거나 간에 현실적인 혹은, 상상적인 공포로 인해서 고통을 당합니다. 인간이 체험하는 공포의 종류가 무수하기 때문에 그것을 낱낱이 열거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이 공포로 가득 차 있다면 도저히 행복해질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풍성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공포의 세력에서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예수는 공포가 선의 동기로 쓰일 수 있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이점에 우리는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현대의 수많은 전도자들의 경우와 같이 예수가 사람들에게 선한 생활을 장려하기 위한 수단으로 영원한 형벌의 위협을 사용하신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분명히 그는 사람의 영원한 운명이 자기의 선택 행위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밝히셨습니다. 예수는 이를 갈며 슬피 우는 바깥 어둠의 세계를 구체적으로 묘사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제자들로부터 배신당하는 경우에 있어서까지도 이러한 형벌로 그들을 위협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사랑에서 우러나온 헌신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밖에 다른 이유로 그를 섬긴다면 이것은 단연코 그를 우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곳에는 결코 두려움이 들어서지 못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가르친 바와 같이 온전한 사랑은 모든 두려움을 쫒아 냅니다.(요일 4:18)
◑ 문제성
예수가 가르치신 행복의 비결은 공포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습니다. 오늘날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예수가 사시던 시대에도 두려움의 주된 원인으로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돈을 사랑하고 빈곤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태도는 사실에 있어 동전의 앞뒤와 같습니다. 왜냐하면 돈을 사랑한다는 것은 경제적 불안정과 빈곤에 대한 무의식적인 두려움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20세기의 중요한 문제들 가운데 대부분이 경제적 불안정성에 기인하고 있습니다.
노동자들은 실직 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업가들은 파산에의 공포를 안고 삽니다. 결혼상담소의 실무자들은 수많은 결혼이 경제적 곤란으로 인해 파경에 이른다고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기대하던 것만큼 빨리 진급을 못할 뿐 아니라 자기가 당연히 받을 만큼의 봉급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불행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말한 바울의 교훈은 참으로 진리입니다.(딤전 6:10) 예수가 재물에 관해서 언급하신 후에 두려움에 관한 교훈을 하셨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19-21)
비록 예수의 말씀을 들으러 나온 청중의 대부분이 가난한 사람들인 것을 아셨지만 그는 재물의 위험성을 강조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돈이란 것이 부자에게 뿐만 아니라 가난한 사람에게 있어서도 멸망의 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재물 자체를 정죄하시거나 부자들을 맹목적으로 악하다고 비판하시지는 않았습니다. 그의 교훈을 자세히 검토해 보면 예수가 정죄 하신 것은 돈 자체가 아니라 그 돈을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는 사람들의 태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 재물이 많은 청년의 예화가 있습니다.(마 19:16-22) 그는 자기의 경건한 생활로 인해 칭찬을 받아 보려고 예수께 찾아 왔습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는 어려운 계명 하나를 받았습니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마 19:21)
이 청년에게 있어서는 재물이 인생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는 예수께서 구원의 비결을 갖고 계신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돈에 대한 그의 신뢰는 너무나 크고 빈곤에 대한 두려움도 컸기 때문에 도저히 예수의 충고를 받아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마태는 이와 같이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그러나 예수는 그에게 수치감이나 죄책감을 불러일으키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이 사람을 위해서 성취의 더 높은 단계를 소개해 주셨습니다. 이 청년은 모든 계명을 잘 지켰으나 빈곤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지를 못했습니다. 영원한 가치에 그의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잠시 있다가 사라져 버릴 현세적 사물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의 보물을 쌓아둔 곳은 하늘이 아니라 이 땅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경건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거짓 자만을 맹렬하게 비판하셨습니다. 특히 그는 자기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사람을 신랄히 공격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떠한 사람에게도 수치감을 갖게 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 청년은 재물에 너무 지나친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그에게 있어 재물은 안정감을 유지하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예수는 재물 자체가 악하다고는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가 정죄 하신 것은 재물에 부착된 마음의 태도입니다. 영적 생활의 단계를 결정하는 것은 돈 자체가 아니라 그 돈에 대한 현실적 감정처리입니다. 예수는 재물을 많이 가지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사실 그는 이 두 가지를 겸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으나 어려운 일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예수는 또 이렇게 부언하셨습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마 19:24, 26) 부자는 그의 재물을 적절하게 사용할 때에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가 만일 생활의 안정을 위해서 돈을 신뢰하거나 그것을 생의 지배적인 목표로 삼거나, 혹은 빈곤을 너무 두려워해서 자기의 재물을 선한 사업에 투자하는 일이 없다면 그의 돈은 그에게 있어 하나의 우상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마 6:22-23)
옛 번역에는 이 구절에서 '옳게 보는 눈', 혹은 '약한 눈'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의 청중들이 익히 알고 있던 유대인들의 수사 용어였습니다. '옳게 보는 눈'은 신체적 건전성을 의미했습니다. 그리고 자유로운 태도의 소유자를 가리키기도 했습니다. '옳게 보는 눈' 혹은 '건강한 눈'을 가진 사람은 질병이 없는 사람일 뿐 아니라 구제해야 될 곳을 자유롭게 볼 수 있기 때문에 자유롭게 구제하는 사람입니다. 그와 반면에 '약한 눈'은 신체적 질병과 인색한 마음의 태도를 가리킵니다. 안질에 걸린 사람은 다른 사람의 궁핍이나 곤경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도움을 베풀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인색해서 자기의 재물을 적절하게 쓰지 못하는 사람들을 장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건강한 영적 시력을 회복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부성애를 키워나갈 때 가능합니다. 자기가 찾는 사물에 자기의 시선이 간다는 것은 하나의 생리적인 법칙입니다. 우리는 일상생활의 경험을 통해 자기가 늘 다니는 거리를 지나다가 어떤 한 순간에 자기가 이전까지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낡은 건물을 보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에 대해서 부성애를 갖고 있는 사람은 자기의 재물을 선하게 쓸 수 기회를 모색할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하나의 좋은 예가 됩니다. 제사장과 레위인도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간 바로 그 길을 지나갔습니다. 세 사람은 다 함께 똑같은 하나의 상황을 목격했습니다. 한 사람이 매를 맞고 옷을 빼앗긴 채 길 옆에 누워 있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자비를 베풀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하지 못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바로 여기에 건강한 눈과 약한 눈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더 뚜렷하게 강조하시기 위해서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여기서 '섬긴다'는 단어는 함축적으로 볼 때 '노예처럼 섬긴다'는 뜻을 가리킵니다. 예수는 우리가 두 주인을 위해서 자기의 삶을 바칠 수 없음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과오를 범하고 있습니다.
'맘몬'이란 단어는 번역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재물을 의인화 한 것일 것입니다. 예수는 너희가 하나님께 신실하면서 재물을 동시에 가질 수는 없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가 말씀하신 뜻은 "하나님께 신실하면서 재물을 우상화 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는 이유는 그렇게 하면 우리의 마음이 두 가지로 갈라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재물을 신뢰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을 것입니다. 보물을 하늘과 땅에 동시에 쌓아 두려는 것은 우리가 한꺼번에 위로 뛰면서 아래로도 뛰려고 하는 것처럼 불가능한 시도입니다.
◑ 처방
예수는 장래의 활동을 위한 계획도 없이 그의 청중들로부터 떠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는 병을 진단하실 뿐만 아니라 처방까지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 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자나 더할 수 있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에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나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안 하고 길쌈도 안 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
많은 사람들은 이 말씀의 뜻을 오해합니다. 왜냐하면 언뜻 보기에 이 말씀은 무책임성과 단견(근시안적 견해)을 예찬하는 듯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이상적인 꿈에 불과할 뿐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에는 전적으로 채택할 수 없는 비현실적 명령인 듯이 보이기도 합니다. 특히 25절의 옛 번역에 소개된 '아무 것도 생각하지 말라'는 표현이 신랄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희랍어의 원뜻을 살린다면 애써서 "걱정하지 말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입니다. 개역판 성경에도 그렇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불안'이 본문의 중심적 개념입니다. 음식과 의복을 위해서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라. 이 말씀은 무책임성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하므로 키를 한 치라도 더 늘일 수 있겠느냐?고 하셨을 때 예수는 불안의 무용성을 단적으로 설명하신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예수는 해학적인 표현을 사용하시면서 근심과 불안에 의해 상황을 변경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셨습니다. 사실 현대의 모든 학술적 연구의 결과는 우리가 쓸데없는 걱정과 불안과 공포로 인해 오히려 기회를 놓치게 된다는 사실을 밝혀줍니다.
많은 사람들은 의지력만 가지고도 그들의 불안과 공포를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사랑의 의지로 가능하지만 추상적인 의지로 공포를 제거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는 공포를 보편적 현상으로가 아니라 특수한 마음의 반응 및 태도로 취급하셨습니다. 즉, 돈과 음식과 의복에 너무 지나치게 의존하게 될 때 공포가 따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물질들은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사물이 아닌 제 3의 세력에 의존하게 된다면 공포의 세력을 손쉽게 극복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지식이 공포를 몰아내는데 필요한 제 일차적인 요건입니다. 우리가 인생이 재물과 음식과 의복보다 더 귀중한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이러한 물질들은 그다지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재물이 없으면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목숨이 음식보다 귀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사람들은 흔히 관습적으로 어떠한 사물에 대한 공포감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의 공포감이 전혀 조건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안다면 그들은 그 공포의 감정을 쉽사리 몰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공포를 이겨내는데 필요한 세 번째의 태도는 인생의 목적을 확립하는 것입니다.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 있어서는 공포의 원인이 되는 상황이라도 능히 극복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역경 속에서 대학교육을 받은 청년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수업료와 책값과 식사를 위한 비용을 염려하기 전에 그들은 우선 학습에 몰두했습니다. 그들은 여러 가지 잡다한 현실적 문제들이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가 가르쳐 주신 인생의 목적은 이것입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영혼의 구원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혀 있을 만한 시간적 여유를 갖지 못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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