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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의 교훈
  연구과 (예수의 생애와 교훈) - 5 과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태복음 7:29).”

가끔 “새로운 종교”, “미래의 종교”, 혹은 “앞으로 도래할 종교”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예수님의 교훈을 더 넓게 전파하기 위해서 이런 용어를 쓴다면 나쁠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이전에 없던 하나의 새로운 “교리”를 의미한다면 여기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무엇 때문에 완전무결한 교훈 자체를 고치는데 시간을 낭비하겠습니까?

예수가 이 땅에 오셨을 때 그의 민족은 자기 나라의 주권을 회복시켜줄 수 있는 정치적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 그들을 구원 해주리라 믿던 자가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라고 말했을 때 그들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마치 얼굴에 찬물을 끼얹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듣거나 생각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가르침이었습니다. 진실로 그는 많은 백성들을 놀라게 했습니다(사 52:15). 우리는 예수의 말씀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온유(meek)란 말은 앵글로색슨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원래 신사(gentleman)라는 단어의 동의어였습니다. 온유는 열성과 격정의 결핍상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제할 수 있는 열성과 격정을 뜻합니다. 온유란 뜻의 희랍어 단어인 “프라우스”는 “온순”, “점잖음”, “순한” 등을 뜻합니다. 말을 길들일 때 언급하는 단어로도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온순한 사람이란 자제력을 지닌 사람을 가리킵니다. 또한 자기의 역량을 적절하게 사용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민수기 12:3은 모세가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한” 사람이라고 기록합니다. 예수는 이러한 사람들이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역사는 그의 말씀이 옳았음을 증명해 줍니다.

예수의 교훈 가운데 또 하나 놀라운 말씀은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입니다. 지상의 권력에 대한 욕망과 오랫동안 그들을 핍박해 온 자들에 대한 복수심으로 가득 찬 그들은 이러한 교훈에 쉽사리 동화될 수 없었습니다. 온 세상이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데는 너무나 오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온 세상은 우리가 경험했던 바와 같이 평화를 얻기 위하여 가공할 만한 비싼 대가를 치러왔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무죄한 부녀자와 부모들이 고통을 당한 것, 도덕의 기준이 무너지고, 세계가 짊어진 국채는 언급하지 않더라도 수백만 명의 전사자가 생겼고 부상병은 전사자보다 갑절이 많았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병에 걸렸습니다. 그러나 제2차 대전의 참상은 이것과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어리석은 인간의 역사는 우리로 하여금 화평에 관한 예수의 교훈이 얼마나 귀한지를 다시 한번 깨닫게 해 줍니다.

“화평”의 교훈은 가정과 교회와 사회, 국가간에 분쟁이 발생한 곳 어디를 막론하고 적용됩니다. 평화의 사도가 제정하신 황금률(마 7:12)은 모든 종류의 인간적 갈등을 해소시켜 줄 것입니다. 우리는 어디에 있든지 “화목자”가 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 5:7).” 역설적으로 보이는 또 하나의 새로운 교훈입니다.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2).”는 말씀과 그 맥이 같습니다. 세상은 이러한 교훈의 정신을 깨닫는데도 역시 둔합니다. 우리는 남에게 자비를 베푸는 대신에 그들로부터 자비를 기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말을 자주 듣습니다. “내가 왜 이런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가?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어.” “다른 사람들에겐 행운이 잘도 생기는데 나는 왜 이렇게 불행할까? 내가 불행할 때 다른 사람이 행복한 것을 보면 참을 수 없어.” 이런 말을 할 때 우리는 대체로 자기를 속이게 됩니다. 우선 우리는 자신의 결함을 감추기 쉽습니다. 또, 자기의 임무를 무시하고 잊어버리기도 쉽습니다. 자기에게 맡겨진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을 때 우리는 이렇게 변명하기 쉽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그 많은 일을 다 하고 살 수 있나요.” 이러한 말은 한 마디로 양심적이기 못한 변명입니다. 바울은 시종일관 자기가 양심적으로 옳다고 믿는 행동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은총을 받았습니다. 야고보는 말했습니다.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약 4:17).”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못한 죄는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했을 때 무엇을 기대하겠습니까?

사람은 자신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은 실망은 과장하고 자신의 결점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대체로 행운은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에게 옵니다. 어떤 사람에겐 행운의 조건이 되지만 어떤 사람에겐 불운이 되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식물을 자라게 하는 태양이 어떤 경우에는 생물을 말려 죽게도 하는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인간의 일은 자업자득입니다. 자비를 베풀면 다시 돌아옵니다. 많이 투자하면 많은 수확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아무 것도 투자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씨를 뿌리는 자마다 거두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예수가 오시기 수세기 전에 하나님은 간음을 정죄하셨습니다. 예수는 그 계명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8).” 땅에서 나무를 자른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흙에서 나무의 뿌리를 뽑아 버려야 완전히 죽습니다. 예수는 이것을 아셨습니다. 나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으므로 그것을 뿌리 채 뽑지 않으면 다시 자라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같은 예수의 교훈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왜곡된 생각으로는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잘 자신을 절제하는지 판단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과식을 금지하고 있으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과식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과식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렇다고 해서 과식 자체가 정당화되지는 못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가 없으신 분에 의해서 세워진 이상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러한 원리의 엄격성이 완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규제 없이는 파멸을 초래할 수밖에 없는 충동과 욕망이 일반적인 사람에게 모두 있습니다. 예수가 예방하려고 하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인간은 이러한 사념들을 자신의 마음에서 추방할 수 있는 능력을 선천적으로 타고났습니다. “머리 위로 새가 못 날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머리 위에 집을 짓지 않게 할 수는 있다.”는 격언에서 이를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원리는 인체와 수많은 세균들의 생태를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적당한 영양을 섭취하고 운동을 해서 건강한 체력을 지니게 되면 인체는 세균의 침입으로부터 면역성이 강해집니다. 그러나 몸이 쇠약해졌을 때 세균들이 인체에 파고 들어가면 암이나 폐결핵 등 질병에 걸려 즉시 치료를 받지 않으면 생명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내면세계도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을 규칙적으로 잘 섭취한다면 건전한 분위기에서 부지런히 선을 행하며 살 수 있을 뿐 아니라 설령 악한 씨앗이 들어오더라도 뿌리 내릴 터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번 악한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싹이 돋아나면 그것을 모두 한꺼번에 파헤쳐 없애버리기 어려울 것입니다. 암에 걸렸을 때처럼 큰 수술이 필요하게 됩니다. 그러나 죽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예수는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마 18:8, 9).”

다시 예수는 말씀하십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 욕심 많은 독수리처럼 탐욕에 젖은 자는 결코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그가 지으신 만물을 통해서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섭취하며, 그의 모든 피조물 가운데서 그를 봅니다. 자연과학자들이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대단히 안타까운 일입니다. 근시안적이어서 자연세계 너머를 보지 못하고 바로 눈앞에 있는 물질세계만 보는 것입니다.

적개심에 관한 예수의 교훈 또한 새롭습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1, 22).” 악의 뿌리를 근절시키려는 또 하나의 교훈입니다. 분노의 불길은 처음에 끄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불길이 너무 크게 번지면 어쩔 도리가 없게 됩니다. 예수는 살인 행위를 금지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음을 아셨습니다. 분노를 억제하지 않으면 주먹싸움이 되고 그것이 살인을 불러옵니다. 질병과 마찬가지로 범죄를 종식시키는 유일의 방법은 예방입니다. 예방을 가능케 하는 오직 하나의 방법은 원인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무저항에 관한 예수의 교훈은 그 중에서도 가장 놀랍습니다. 말씀하시기를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치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마 5:38~41).” 이 원칙은 모세의 율법과 어긋납니다. 인간의 본성과도 분명히 모순이 됩니다. 이를 실천에 옮기는 것은 아주 어렵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를 때릴 때 우리는 다음의 세 가지 행위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게 됩니다. ((1)) 보복을 하거나 ((2)) 돌아서서 달아나거나 ((3)) 다른 편 뺨을 돌려 대는 일입니다. 이 세 가지를 살펴봅시다. 보복을 해서 문제가 해결된 적이 있습니까? 설령 있다 해도 그것은 지극히 드문 일입니다. 대개는 사태를 더 악화시킵니다. 한편 도망을 친다는 것은 모욕을 자초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다른 편 뺨을 돌려 댄다면 그는 원수의 무장을 해제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가해자는 부끄러워 할 것입니다. 당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행위를 비겁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그의 용기를 칭찬하고 존경할 것입니다. 결국은 그에게 생각할 여유를 주고 분노를 가라앉게 해 줄 것입니다. 그는 폭행을 가해야겠다는 생각을 버리게 될 것입니다. 자기가 때린 사람을 만났을 때 겸허한 자세를 취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하는 자들이 타인에 대하여 오만하게 굴며 냉대하는 경우를 드물지 않게 봅니다.

예수가 가르치신 교훈의 절정은 여기에 있습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 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마 5:43~45).” 회의론자들은 이 위대한 교사가 말씀하신 교훈의 가치를 묻는 대신에 그들 자신이 이 교훈에서 벗어나기 위한 변명을 찾으려고 애씁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합니다. 그리스도가 완전하신 분이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예수가 어디서 그 교훈들을 배우셨는지를 증명해야 합니다. 그들은 어리석게도 예수가 자기의 모든 생각을 남에게서 빌려왔다고 생각합니다. 예수의 교훈은 동서양에서 이미 가르쳤던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이 비슷한 예를 몇 가지 찾아내긴 했으나 본질적인 핵심은 여전히 빗나가고 있습니다.

예수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이유는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들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인간을 한결같이 사랑하신다는 것은 악인과 선인에게 햇빛을 고르게 비쳐주시고 바른 자와 부정한 자 위에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는 사실을 보더라도 증명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과 같이 되고 싶어 합니다. 늘 그런 소원을 갖고 있었습니다. 태초에 마귀가 이 사실을 간파했습니다. 여인에게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창 3:5)”라고 말하여 선악과를 먹는 죄를 범하게 했습니다. 오직 예수만이 하나님과 같이 되는 진정한 방법을 가르쳐 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은 사랑이신 까닭에 모든 사람들이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신 까닭에 독생자를 보내셔서 세상을 위해 죽게까지 하셨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자 한다면 아버지가 그리하셨던 것처럼 원수까지도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랑하되 힘이 자라는 데까지 성심껏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는 원수를 사랑함에 있어서 우리가 그를 사랑하는 만큼이나 우리의 부모나 자녀나 친척에 대해서 만큼만 사랑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사랑을 요구하셨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갈 6:10).”

이 교훈은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과 인간의 형제 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께 와서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하였을 때 그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란 말로 시작하셨습니다. 이전에는 하나님이 권세 있는 전제 군주처럼 묘사되어 왔습니다. 아무도 그를 아버지로 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개념은 그와 인간의 새로운 관계를 설정해 줍니다. 요한은 이 개념을 이해하고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요일 3:1).” 자애로우신 아버지께 나아갈 때와 권세 있는 군주 앞에 나아갈 때 우리의 태도는 현저한 차이가 납니다. 예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을 때 이 생각을 강조하신 듯합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11).”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새로운 관계는 이웃에 대해서도 새로운 관계를 설정하게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라면 우리는 모두 형제입니다. 예수가 정하신 오직 하나의 한계는 이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마 12:50).”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자는 마귀의 자식들입니다. 그는 모든 인간을 두 가지로 나누십니다.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식들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 둘 중 하나에 속합니다. 거기에 중간은 없습니다.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마 12:30).” 예수의 말씀입니다. 예수가 판단하시는 오직 하나의 조건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이었습니다. 인종이나 색깔이나 신분, 그 밖의 어떤 조건도 하나님의 가족을 나누지 못합니다. 바울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7-28).”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신뢰에 관하여 예수가 가르치신 교훈은 여기서 그 정점을 이룹니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 6:25,26)” 분명히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을 보살피십니다. 이것은 나태를 조장하려는 의도에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일을 하도록 권면하십니다. 우리의 모범이 되시는 예수도 언제나 바쁘셨습니다. 그는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이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 3:10).”고 했을 때 그는 이 사실을 납득시키려고 한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자신을 맡긴 사람으로서 우리에게 모범이 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라(빌 4:11).”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맡겨진 임무를 다할 때 거기에 불안과 근심이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새들도 지켜 주시거늘 하물며 그의 자녀들을 내버려두실 까닭이 있겠습니까?

끝으로 이렇게 물어 보겠습니다. 예수는 그가 가르치신 교훈을 모두 어디서 배우셨겠습니까? 어느 한 나라의 사람이 그 모든 교훈을 통합할 수 없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사실 그 교훈 가운데 본질적인 요소를 일찍이 가르쳤던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근본적인 교훈 가운데 몇 가지는 유대인들이 가르쳤고, 어떤 것은 희랍인들이나 로마인들이 가르쳤으며, 어떤 교훈은 중국, 인도, 이집트인들이 가르쳤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러면 예수가 어떻게 온 세상에 흩어져 있던 이 교훈을 모두 습득하실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이 모든 교훈을 습득해 그 가운데 섞여있는 찌꺼기를 걸려낸 후 다시 정교한 말씀으로 개조하실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이처럼 훌륭한 가치관을 지닐 수가 있었을까요? 그가 이 모든 교훈을 표절한 것이라면, 역사를 통해 여러 가지 시련을 겪은 후에도 의연히 그 진리성을 간직하는 말씀을 미리부터 알고 계셨다는 사실은 이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는 힐렐이나, 가마리엘처럼 랍비 문하에서 공부하신 적이 없습니다. 어느 이방인 철학자에게서 배운 적도 없습니다. 단 하루나마 학교에서 공부하신 적도 없습니다. 그를 아는 원수들마저 이렇게 질문할 정도였습니다.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 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예수는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요 7:15,16).”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비평가들은 예수의 적대자들이 그 당시 예수에 관해서 알지 못했던 몇 가지 사실을 알아냈다고 주장합니다. 즉, 그들은 예수가 학교에 다니신 증거를 찾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예수가 학교에 다니시던 때를 묘사하느라고 오랜 시간을 소비했습니다. 예수의 교훈과 생애는 완전무결합니다. 그러한 분이 친히 가르치신 교훈의 출처를 말씀해 주셨는데 우리가 그것을 믿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는 30세가 넘으셨고, 그의 생애 가운데 짧은 공생애 기간을 제외하고는 나사렛 촌에서 목수로 일하셨습니다. 그에게는 세계적인 문헌에 접근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가 쓰신 유일한 문장은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모래 위에 쓰신 글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 앞에서 그들이 1,500년 동안이나 지켜오던 그들의 율법을 오직 한마디의 말씀으로 무너뜨리고 세상을 개혁시킬 새로운 교훈을 가르치셨습니다. 또한 그 당시에는 역설적으로만 보였던 그의 교훈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 진리성을 바로 입증하게 되었습니다. 학자들은 예수의 교훈과 동일한 가르침을 다른 곳에서 찾아내거나 아니면 당시 그의 말씀을 경청한 자들이 말한 것처럼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나이다(요 7:46).”라는 사실을 고백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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