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디    ID저장
비밀번호     








  
   
  예수의 십자가
  연구과 (예수의 생애와 교훈) - 16 과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이사야 53:3)"

희롱의 뜻으로 예수에게 홍포를 입혔습니다. 가시로 엮은 면류관을 씌웠습니다. 그의 손에는 홀(왕권을 표시하는 패) 대신에 갈대를 쥐어 주었습니다. 희롱이 잠시 멈추어졌을 때 홍포를 벗기고 예수의 옷을 입혀서 죽음의 행진을 떠났습니다. 지난밤에 겪으신 고초로 인해서 기운을 완전히 잃어버린 예수는 그가 심문을 받으신 곳에서 성 밖에 위치한 골고다의 언덕까지 오르기가 심히 어려웠습니다. 예수는 잠시 후에 자기의 몸이 못으로 박혀질 무거운 십자가를 메고 죽음의 행진을 떠납니다. 기운이 모자라서 넘어지셨을 때 구레네 시몬이 이 십자가를 대신 메었습니다. 수많은 무리들이 이 행렬을 따랐습니다. 그 가운데는 예수와 혈족 관계가 있는 여인들과 그의 추종자들이 섞여 있었습니다. 이 여인들은 자기들 앞에 전개되는 비극적 장면에 너무나 강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비탄과 애조 띤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이를 보시고 예수가 말씀하셨습니다."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눅 23:28-30)"

여기서 예수는 40년이 지나기 전에 있을 예루살렘의 함락과 또 그 백성들이 겪어야 할 고난을 역력히 내다 보셨습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언덕을 히브리어로 '골고다'라고 부릅니다. 라틴어로는 해골의 언덕을 의미하는 '갈보리'로 불렀습니다. 왜 그렇게 불렸는지는 분명히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곳이 사형장이었기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언덕에 올라 왔을 때 예수의 옷이 다시 벗겨졌습니다.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은 로마 병정이 이 옷을 각자 찢어 가졌습니다. 이 옷 조각들은 그들이 수고한데 대한 전리품이었습니다. 예수가 입으셨던 속옷은 잇지 아니하고 위에서 통째로 짠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옷을 찢지 말고 제비 뽑아 한 사람이 갖기로 하자고 의논했습니다. 이것은 성경의 말씀이 이루어진 셈입니다.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요 19:23-24)" 이들 이방 군사들은 1000년 전에 자기들에 관해서 성경에 예언된 사건을 지금 자기들이 성취하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이것은 예수가 구약에서 약속된 메시아이심을 보여주는 수많은 사건 중에 하나였습니다. 예수와 함께 두 명의 '행악자'가 양편에서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눅 23:32). 마태와 마가는 이들을 강도라고 했습니다(마 27:38), (막 15:27). 미국 표준역에 의하면 거기에는 '도적'으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형벌은 유대인들이 고안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사형 집행 방법은 투석이었습니다. 로마인들은 단두형에 처해졌습니다. 예수는 로마인이 아니었습니다. 로마법에는 이국인으로서 십자가의 형을 받으셨습니다. 이것은 그 당시에 현존하고 있었던 형벌 가운데 가장 고통스럽고 창피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유대인의 관습에 어긋나는 처형 방법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를 이렇게 처형하고자 했습니다. 사형수의 십자가 위에 죄목을 써서 붙이는 것은 로마의 관습이었습니다. 총독 빌라도가 죄목을 작성하여 예수의 십자가 위에 붙인 내용은 이러합니다. "이는 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마 27:37, 요 19:19)" 이것은 그 시대에 종교 법률 및 철학을 상징하는 히브리어, 라틴어, 그리고 희랍어로 쓰였습니다. 빌라도가 이렇게 풍자적인 죄목을 쓴 것은 그가 가이사로부터의 혐의를 벗어날 뿐만 아니라 또 유대인들에 대한 그의 경멸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에게 무죄한 자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강요했으므로 이제 그는 저들이 예수를 정죄한 명칭을 예수께 줌으로서 그 보복을 한 것입니다.

대제사장은 이 죄명을 고치려고 했습니다. "유대인의 왕"이라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고 했습니다. 그는 죄명을 고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치욕이었습니다. 그러나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쓸개즙을 섞은 신포도주를 마셔야 했습니다. 그것은 "몰약과 섞은 포도주"입니다. 이 혼합물은 예루살렘에 있는 인정스러운 부녀자들이 처형자의 육체적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서 마취제로 준비한 것입니다. 예수는 그것을 맛보시고 마시기를 거절하셨습니다. 그는 완전한 의식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서 즉 인간을 대신하여 고통을 당하시고 온 인류를 위하여 전율과 공포 속에서 죽음을 맛보려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무리들의 비정스러운 희롱은 그를 철저하게 경멸하고 모독하기 위한 노력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한길 옆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듯싶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예수가 평소에 가르치신 말씀과 그에게 가해진 정죄의 내용을 알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이제 그가 죄인으로 처형 받게 되었을 때 모든 사람들은 그를 조롱하고 비웃었습니다. 무의식중에 그들은 그들 자신의 성경에 기록된 예언을 성취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머리를 흔들면서 조롱하여 말하기를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주님의 공적 활동 초기에 그는 성전에 들어가셔서 그 속에 있는 온갖 오물을 제거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께 와서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위의 표적을 구했을 때 이런 대답을 하셨습니다."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 요한은 예수께서 자기의 몸을 가리켜서 성전이라고 하신 사실을 설명해 줍니다. 예수를 정죄할 자료를 얻지 못하게 되었을 때 유대인들은 산헤드린에서 예수께 대한 심문이 시작되자 이 말씀을 다른 뜻으로 고해 바쳤습니다(마 26:60-61). 희롱 자들은 계속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로 보고 믿게 할지어다(막 15:32)"

예수는 여러 차례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유대인들을 피하셨습니다. 이제 그들은 예수를 안전하게 십자가에서 못 박아 버린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이적을 여러 번 행하셨습니다. 그는 병자를 고치시고 문둥병자를 깨끗케 하시며 굶주린 자를 먹이실 뿐 아니라 죽은 자를 살리시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리신 것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자기를 믿게 하는 방법은 그가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신 후에 다시 살아나시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달이 지나기도 전에 예수의 사도들 앞에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우리가 어찌할꼬?(행 2:37)" 이제야 그들이 얼마나 무서운 죄를 범했던가를 깨닫고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용서를 빌고자 했습니다. 예수는 아버지께 구하여 열 두 영이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하실 수 있었습니다(마 27:53). 이것은 그가 세상에 오신 목적을 방해할 뿐이었습니다.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가로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이 지도자들은 농담으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를 조롱하기 위해서 이런 말을 한 것이지만 그 속에는 깊은 진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는 다른 사람들의 구주가 되셨으나 자기는 구하실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인간들의 대속물로서 자기의 생명을 내어 주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것은 인간들이 참으로 깨닫기 어려운 진리입니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고난의 메시야보다는 승리의 정복자를 더 환영합니다. 그들은 새로운 삶, 하나의 더 위대한 삶을 갖기 위해서는 그 전에 먼저 옛 생명의 청산, 즉 죽음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또 어떤 자들은 예수를 비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 지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그들은 예수가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신 때부터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까지 모든 문제를 아버지께 내 맡기셨던 일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에게 승낙하셨다면 자기를 구해야 할 것이라면서 그의 곤경을 더 비참하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이 날까지 예수가 하신 말씀(이제는 아무 가치도 없어 보이는)을 상기시키면서 그를 조롱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어리석은 행위를 한껏 즐겼습니다. 무리들이 비웃고 희롱할 때 예수는 불쌍한 마음으로 내려다보시면서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깊은 동정과 사랑은 인류의 구주되신 예수밖에는 어떤 인간도 지니지 못합니다. 그는 우리를 고난에서 구해 주시려고 십자가 위에서 친히 고난과 수치를 당하셨습니다. 우리는 그의 기도를 오해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인간들이 그에게 반역하고 완강하게 버티고 있는 한 인간들의 죄를 용서하실 수 없습니다. 예수의 목적은 매사에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의 기도는 받아 들여졌습니다. 그 응답이 그 자리에서 곧 일어난 것은 아닙니다. 53일 후에 사람들은 자기들의 죄를 깨닫고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 할꼬?" 사도 베드로는 대답했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 2:37,38)" 3000명이나 되는 무리들이 즉시 이 지시에 응답하여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 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합니다. 예수는 "죄 가운데만 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죄 속에서 나오는" 사람들을 구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의 원수들이 죄악의 길을 떠나기까지는 그들의 잘못을 속량하고 그 마음을 정결케 하는 일이 불가능했습니다. 무리들을 내려다 보셨을 때 예수는 그의 친척이며 또 그가 사랑하시던 요한을 보셨습니다. 그리고는 십자가 뒤로 그를 따라온 여인들 가운데 몇 사람을 보셨습니다. 그 가운데는 예수의 어머니도 계셨습니다. 그는 어머니께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 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요 19:26)" 예수는 그 어머니를 제자에게 부탁하셨습니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던 두 강도는 다른 무리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를 욕했습니다. 그 중에 한 강도는 회개하여 예수를 모욕하는 다른 강도를 꾸짖었습니다(눅 23:40-41). 그는 예수께 간절히 탄원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그는 그리스도의 나라에 대해서 완전한 이해를 갖지 못했습니다. 예수의 가장 가까운 제자들까지도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어쨌든 이 강도는 예수가 그의 나라에 임할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직도 하나님이 그를 십자가에서 구해 주시리라 믿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예수께서 자기까지 십자가에서 내려오게 하신 후에 그의 나라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게 해줄 것을 갈망하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확실히 그의 생각은 희미했고 그의 믿음은 보잘것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정도의 믿음이라도 주님께로부터 칭찬을 받기에는 충분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 강도의 태도는 칭찬 받을 만 합니다.

"제 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더니" - 낮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계속된 어두움입니다. 유월절이 시작될 즈음에는 언제나 만월이었기 때문에 일식이라고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이적이었습니다. 온 만물이 그 창조주를 탄식했습니다(요 1:2, 히 1:2). 땅이 갈라지고 바위가 굴러 떨어졌습니다(마 27:51). 진실로 이것은 유사 이래 최악의 암흑이 사로잡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는 혼자서 이 모든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는 제 삼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막 15:25)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는 뜻이라(마 27:46)" 이것은 세상에서 들어 본 것 중에 가장 애끓는 호소였습니다. 육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고뇌, 그리고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고독의 표현이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죄 짐을 그가 짊어지신 것입니다. 그는 이 일을 혼자 감당하셔야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보고 참지를 못하시기 때문입니다.

죄는 언제나 하나님으로부터의 관계를 단절합니다. 용서받지 못한 죄인의 마지막 형벌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영원한 단절 즉 그의 임재로부터의 영원한 추방입니다. 예수는 모든 인간을 위해서 죽음을 맛보신 십자가 위에 달리셨을 때 지극히 쓴잔의 찌꺼기까지 모두 다 마신 것입니다(히 2:9). 여섯 시간 동안 십자가 위에서 고통을 당하신 예수는 목이 타오르고 입술이 바싹 마르며 혀가 굳어져서 말을 하실 수 없었습니다. 그 곁에 섰던 자들은 그를 오해했습니다. 그들은 그가 엘리야를 부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히브리어에 있어서 "하나님"과 "엘리야" 란 단어는 그 발음이 매우 비슷합니다). 엘리야는 죽지 않고 승천하였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그가 내려와서 그에 관한 예언을 실현할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말 4:5-6) (마 11:14). 그들은 예수가 지금 엘리야를 오게 해서 자기의 곤경을 구해 줄 것을 기다리는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는 "목마르다"(요 19:28)고 하셨습니다. 이 소리를 듣고 곁에 선 자 중에 하나가 신 포도주를 떠서 그에게 드렸습니다. 이것은 처음에 그를 마시게 했던 마취제로서의 신술이 아니었습니다. 무리들은 소리를 질렀습니다.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구원하나 보자(마 27:48,49)" 이것은 그에게 포도주를 드린 자를 꾸짖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엘리야가 오는 것을 방해하지 말라" 그 말입니다. 그들은 하늘과 땅에 있는 어떠한 권세로도 그를 구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지상 최고의 날이었습니다. 기뻐 날뛰었으나 오래 계속되지는 못했습니다. 예수가 신술을 받으셨을 때 그는 "다 이루었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가 육체를 입고 계신 동안의 일은 이제 다 이루신 것입니다. 그는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및 시편에 자기에 관해서 기록된 모든 일을 성취하셨습니다(눅 24:44). 그는 지극히 작은 일에 이르기까지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셨습니다. 가장 큰 임무를 위임 받으셨고 가장 중요한 의무를 실행하셨으며 이 세상에서 가장 부끄럽고도 고통스러운 정죄를 받으셨습니다. 이제 때가 왔으므로 그는 죄악으로 가득 찬 세상의 속죄 물로서 자기를 완전히 내어 주신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필요한 모든 조건을 다 이행하셨습니다. 그 가운데서 빠진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의 생애는 짧았습니다. 그의 공적 활동 기간은 기껏해야 3년이 조금 지났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자기의 일을 모두 성취하셨습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하고(눅 23:46) "예수께서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마 27:50), (요 19:30)"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의 운명을 기록할 때 한 번도 그가 "죽으셨다"고 하지 아니한 것은 흥미로운 일입니다. 그들은 오히려 "그의 영혼이 돌아가셨다"란 표현을 썼습니다. 대체로 보면 한 사람이 십자가 위에서 죽으려면 여섯 시간이 더 걸린다고 합니다. 예수와 두 강도의 죽음을 재촉하기 위해서 - 그렇게 되면 그들의 시체를 유월절이 오기 전에 매장해 버릴 수 있으므로 - 유대인들은 빌라도에게 가서 그들의 뼈를 부러뜨릴 수 있는 승낙을 받고자 했습니다. 병정들은 강도들에게 와서 그들의 뼈를 꺾었으나 "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요 19:33)" 그래서 병정 가운데 하나가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왔습니다(요 19:33-35). 이러한 사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예수가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가시"던 바로 그 순간에 심장 파열로 죽으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다음의 몇 가지 사실은 예수가 어떤 직접적인 이유로 인해서 실제로 죽으셨던 것이라고 믿을 수 있습니다. (1) 몇 개월 전에 그는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요 10:17-18)"
(2) 병정들뿐만 아니라 빌라도까지 "예수가 너무 일찍 죽은" 사실에 놀랐습니다(막 15:44).
(3) 예수가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가셨다"고 하는 것은 그가 아직도 기운이 있을 때에 갑자기 죽음이 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4) 복음서 저자들이 그를 죽으셨다고 하지 않고 "그의 영혼이 돌아가셨다"고 하는 것은 또한 의미심장합니다.
(5) 끝으로 예수가 만일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것이라면 창으로 옆구리를 찔렀을 때에 물과 피가 흘러나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마태, 마가, 누가는 한결같이 "예수가 숨을 거두셨을 때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 휘장의 높이는 약 20큐빗(30피트)이 됩니다.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다는 사실은 분명히 인간의 뜻으로 되어진 일이 아닙니다. 이 휘장은 대제사장이 백성의 죄를 위해서 매년 한 번씩 짐승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던 지성소와 성소의 사이를 구별했습니다. 성소는 예배의 장소(지금의 교회)를 의미한 반면에 지성소는 하나님이 계신 곳(하늘)을 상징했습니다. 휘장이 남아 있는 한 그것은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을 말합니다(히 9:8). 예수가 죽음의 세력을 이기시고 아버지께 돌아가셨을 때 그는 자기를 따르는 모든 자를 위해서 그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사형 집행을 명령한 로마의 백부장은 예수가 죽었을 때 그 옆에 서 있었습니다. 예수의 죽는 태도와 거기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보고 외쳤습니다.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마 27:54), (막 15:30)" 통역자들은 이 로마 장교의 말을 정확히 전달했습니다.

이 사건을 이적으로 밖에는 설명할 도리가 없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모든 비극 중에서도 으뜸 되는 비극입니다. 단지 한 착한 사람이 잔인하게 희롱을 당하고 수치스러운 방법으로 형벌을 당하신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바 되었기" 때문입니다(사 53:3). 유대 나라의 역사상 가장 슬펐던 날은 그들의 오랫동안 대망해 오던 메시야를 그들 스스로가 거부한 날입니다. 그들이 예수의 죽음을 요구했을 때 그들은 이미 자기들의 암담한 미래를 자초한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을 때 그들은 스스로의 멸망을 부른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2000년 동안이나 그들은 죄의 대가를 완전히 청산하지 못했습니다. 매일 같이 그들의 성에 있는 "울음의 벽"에서 애도하는 것은 그들의 비참한 운명을 다시금 상기해 보려는 것에 불과합니다. 예수를 거부하는 비극은 유대인에게서 끝나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받아들이지 못한 백성이 아직도 수없이 많습니다. 이 모든 사람들은 아직도 암흑과 절망 가운데서 헤매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거부한데서 오는 비극은 이것으로 끝나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까지도 우리의 개인 생활은 비극적인 시행착오를 일삼고 있습니다. 우리가 인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그를 우리의 모범이 되시는 구주로 모시지 않는다면 우리의 생활은 비극 속에 그 종말을 고하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최고의 비극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 아닙니다. 죽음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지금도 그를 찾는 모든 자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바로 그 분을 거부한다는 사실이 진정한 비극입니다.
페이지 설정에서 여백 크기 조절 후 인쇄하세요.
   

BCC 소개 | 뉴스레터 | 찾아오시는 길 | 개인정보 보호정책 | TOP ▲
BCC | 서울시 강서구 방화1동 180-14 7F | 비영리법인번호:109-82-03052 | Tel (02) 2662-0793, 2662-8081 | Fax (02) 2662-8082
Portions are Copyrighted 1964-2026 BCC. Contact us for more inform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