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죽을 때에 유대인에게는 사형집행의 권한이 없었습니다. 탈무드에는 주후 30년에 이것이 실행되었다고 합니다. 요세퍼스는 아켈라우스가 해임되고 로마의 수세관들이 유대에 배치되었던 주후 61년에 이루어진 것이라고도 합니다. 이 두 가지의 기록이 상치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런 권한이 언제 빼앗겼던지 간에 그 사실만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산헤드린은 사건을 심리 및 언도할 수는 있으나 사형 선고의 집행은 로마 정부의 승인를 얻어야 했습니다. 로마의 법정은 일종의 공소수리원과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물론 거기서도 사건을 심리할 수는 있습니다. 대체로 유대인들은 어느 정도의 폭넓은 자치권이 허용되어 있었습니다. 율법의 위반 사건은 자기들의 법정에서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의 공적 활동 기간에 본디오 빌라도는 유대의 총독으로 있었습니다. 그는 서반아 세빌레의 태생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유대에 있는 수세관 중에 그 서열이 여섯 번째였습니다. 비난도 칭찬도 없이 누가는 빌라도가 갈릴리인 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사실을 지적했습니다(눅13:1). 이것은 유대인과 이교를 신봉하는 사가들이 그의 행위에 관해서 진술한 것과 일치합니다. 그러나 복음서 저자들은 그가 예수를 진정으로 놓아주고 싶어 했으나 양심과 두려움의 기로에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던 사나이임을 지적했습니다.
가이사랴에 있는 수도를 떠나서 연중 절기가 있을 때마다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이 빌라도의 관습이었습니다. 이 곳에 체류할 동안 그는 헤롯 대왕의 궁전에 있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에서 심문이 끝나고 그들은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저희는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요 18:28)" 예수를 불법으로 죽이려고 한 자들이 불결한 장소에서 오염되지 않으려고 이방인의 관정에 들어가기를 거부한 사실을 생각해 보십시오. 로마 법률에 의하면 모든 사건의 심문은 높이 세워진 심문대 위에서 행해져야 합니다. 또 여러 사람에게 공개되어야 합니다. 로마의 법을 지키고 유대인들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빌라도는 밖으로 나와 궁전의 대리석 건물 사이에 놓여진 상아 의자에 앉았습니다.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소하느냐?(요 18:29)" 이 질문은 유대의 지도자들을 곤란케 했습니다. 고소 내용이 모독죄라고 소개해 봐야 쓸데없는 노릇입니다. 그것은 로마법에 대한 침해가 아닙니다. 그가 이러한 문제에는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께 대한 형식적 고소의 자료도 갖고 있지 않다면 이 수세관은 예수를 그들 스스로가 재판하도록 지시할 것이 분명했습니다. 이러한 곤경에서 빠져 나오려고 대답했습니다. "이 사람이 행악 자가 아니었더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겠나이다(요 18:30)" 빌라도가 그들의 심문 내용을 검토하거나 예수께 다시 심문하지 못하도록 화제를 바꾸어 버렸습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그의 승낙뿐이었습니다. 재판이 이미 끝난 지금 그들은 총독이 그들의 결정에 아무런 비판도 가하지 않고 승인해 주기만을 바랐습니다. 빌라도는 이러한 수작에 넘어갈 만큼 어리석지는 아니했습니다. 그들이 고소 내용을 밝히지 않았으므로 말했습니다. "너희가 저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요 18:31)" 유대인들에게는 결정적인 치명타였습니다. 이 사실은 그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국가 통치권이 박탈당했음을 시인케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있어서 이보다 더 치욕적인 일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빌라도는 이것이 대단히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는 그들의 사형 집행권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그는 예수가 중범죄자로 기소된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고소 자들이 고소의 내용을 밝히지 아니했으므로 그는 이것이 그들의 율법 문제에 관한 것인 줄로만 생각하고 자기는 거기에 관여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산헤드린은 그들의 사형 선고를 집행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예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로마인에게 전가하려고 했다는 근거는 조금도 없습니다. 그들이 곤경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오직 하나의 방법은 그들이 사형을 선고할 권리가 없음을 시인하고 예수에 대한 죄상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이 없나이다(요 18:31)" 그리고는 예수께 대한 세 가지의 죄목을 성급하게 날조했습니다.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눅 23:2)" 그들의 법정에서 제기되었던 고소의 내용과 얼마나 다릅니까? 이 죄상은 산헤드린 심문에서 언급조차 된 일이 없습니다. 왜 이렇게 갑자기 달라졌을까요? 그들의 형편이 그것을 요구한 것입니다. 예수께 대한 마지막 죄상이 거짓으로 날조되었습니다. 수많은 추종자들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열광적으로 따랐습니다. 그러나 "그가 백성을 미혹했다"는 죄목은 지극히 막연할 뿐 아니라 "그가 가이사에게 세금을 못 바치게 했다"는 주장은 당치도 아니한 거짓입니다(마 22:15-22).
예수가 "왕이신 그리스도"로 자처하신 것은 사실입니다. 이것은 그의 원수들이 의미했던 바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뜻입니다. 그는 지상의 왕이 되는 일에 대하여 강경하게 거절하셨습니다. 백성을 미혹한다거나,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기를 거절한다거나, 혹은 자칭 그리스도 왕이라 한다고 주장했을 때 그들은 예수의 언행과 전혀 관계없는 간계를 꾸몄던 것입니다. 그들의 동기는 여하 간에 이 고소의 내용은 국가 반역죄에 해당하는 것이었으므로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예수를 보고 법정으로 따라 오라고 했습니다. 거기서 예수를 심문하려는 것입니다. 예수와 빌라도가 궁전에서 대면하게 되었을 때 총독은 물었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가 되물었습니다.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뇨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네게 한 말이뇨(요 18:33-34)" 빌라도가 질문하게 된 입장은 예수의 답변과 깊은 관계가 있었습니다. 그가 만일 로마인의 입장에서 질문한 것이라면 그는 왕이 아니었습니다. 히브리인의 입장에서 질문한 것이라면 하나님의 메시야로서 그는 왕이었습니다. 총독은 예수께 대답했습니다.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요 18:35)"
유대인이 아닌 빌라도는 그들의 사상적 배경이 종교에 있음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이 사건에 대하여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은 유대인들이 고소한 내용뿐임을 예수께 말했습니다. 예수는 이에 빌라도가 던진 질문에 대답을 하셨습니다. 물론 이것은 타의에 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산헤드린의 심문 때와 마찬가지로 이렇게 중대한 문제가 나왔을 때는 대답을 거절하시지 않았습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다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 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 빌라도는 이 말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그의 귀를 거슬리게 하는 두 가지의 낱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내 나라'입니다. 그 뜻을 충분히 파악하기 위해서 빌라도는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요 18:37)"
물론 총독은 다양한 철학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지만 '진리의 나라' 이것은 그에게 있어서 하나의 새로운 이야기였습니다. 이 나라의 경계는 바다, 강, 호수, 대양, 그리고 산악이 정하지 못합니다. 그가 이 말을 이해했던지 못했던지 간에 그는 이 왕국이 가이사의 왕국과 아무 관계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하여 더 이상 개입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가 진리의 나라에 대하여 말씀하셨을 때 총독은 먼저 그 나라의 가치를 묻고 싶었습니다. "진리가 무엇이냐?" 이 때 그는 하나의 새로운 철학에 대한 종교적 광신자와 토의를 하는 대신에 재판관의 자격으로 그에게 유죄나 혹은 무죄를 선고해야 할 위치에 있음을 기억했습니다. 그는 예수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았습니다. 태초부터 세상은 '진리'를 탐구해 왔으나 예수 한 분밖에는 그 진리의 소재를 우리에게 정확히 지시해 줄자가 없습니다. 빌라도가 이 중대한 질문을 했을 때 그는 불과 12시간 전에 예수께서 온 세상을 위하여 거기에 대한 해답을 주셨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께 기도하시면서 그는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7). 사람들은 그들의 신앙을 여러 가지 종류의 이론과 철학으로 분장하지만 드디어는 절망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신뢰하고 진리이신 그의 말씀에 귀의한 자는 결코 실망해 본 일이 없습니다. 예수를 한갓 종교적 광신자로 간주한 빌라도는 앞으로 나와서 그의 결정을 발표했습니다.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요 18:38)" 예수는 심문 끝에 무죄로 선고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총독은 그의 확신에 대한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는 "극악한 종교적 도덕적 겁쟁이"이었습니다. 그의 결정은 선동자들을 더욱 초조하게 했습니다. "저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하게 하나이다(눅 23:3-5)" 이 말은 반역죄에 대한 그들의 고소 내용을 더욱 확실케 하였습니다. 총독으로 하여금 예수를 정죄할 수밖에 없도록 불을 질렀습니다. 갈릴리는 로마 정부에 대하여 반란을 꾸미는 화약고였습니다. 치안을 유지하고 내란을 진압하기에는 팔레스틴에서 어려운 지역이었습니다. 겁 많은 빌라도는 이 고소를 통해서 도피처를 찾았습니다.
당시 갈릴리의 영주, 헤롯은 예루살렘에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가 갈릴리 사람인 것을 알고 그를 헤롯에게 보냄으로써 그 문제에서 벗어나려고 했습니다. 한동안 헤롯과 빌라도는 적대 관계였습니다. 헤롯은 예수가 경멸하셨던 인간이었습니다. 그는 헤롯을 '여우'라고 부르셨습니다(눅 13:31-32). 이것은 그의 간교한 성격 때문이었습니다. 그 인간 앞에서 예수가 심문을 받게 되신 것입니다. "헤롯이 예수를 보고 심히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라(눅 23:8)" 예수는 이 영주의 환상적인 요구를 거절하셨습니다. "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지 아니하셨습니다(눅 23:8)" 예수는 그의 오만스러운 질문에 대하여 경멸하는 뜻으로 침묵을 지켰습니다. 거기까지 따라 온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서서 힘써 고소하더라" 그들은 예수를 정죄하기 위해서 필사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헤롯은 오히려 그 사실을 가볍게 취급했습니다. 보잘것없는 죄수로부터 자기의 질문이 묵살 당해 버리자 분노를 억제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의 목적이 실패하자 "헤롯은 그 군병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었습니다(눅 23:11)" 예수는 아마 헤롯의 면전에서 자기가 왕임을 주장한 까닭에 정죄 당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예수에게 모욕을 주려고 '빛난 옷을 입혀' 희롱하면서 빌라도에게 도로 보낸 것입니다.
예수의 사건을 처리함에 있어서 엉터리 심문을 한 후에 그 책임을 빌라도에게 다시 전가시켜 버림으로서 곤란한 입장을 모면했습니다. 예수가 로마의 수세관에게 돌아오셨을 때 수많은 무리들이 관정에 몰려들었습니다.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한 사람의 죄수를 놓아주는 것이 관습이었습니다. 무리들이 모여든 것은 이러한 특사를 요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사실은 빌라도에게 한 가지 묘안을 만드는 구실이 되었습니다. 그는 출구를 찾았습니다. 대제사장들과 관원들과 백성들을 불러 모으고 이르되 "너희가 이 사람이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어 왔도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사실하였으되 너희의 고소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 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저를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도다 보라 저의 행한 것은 죽일 일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때려서 놓겠노라(눅 23:13-17)" 이것은 자기의 양심을 달래고 선동자들을 진정시키려는 또 하나의 비겁한 구실이었습니다. "저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마 27:18). 그 시도는 좌절되었습니다. 빌라도는 다시 물었습니다.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마 27:17)" 바라바는 사람을 죽이고 내란을 선동했던 유명한 죄수였습니다. 빌라도는 가장 극악한 죄수를 끌고 나와서 이 둘 중에 누구를 원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결코 바라바를 요구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멸하자 한 것입니다.
빌라도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서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마 27;19)" 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 때였습니다. 빌라도의 가족은 예수를 알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 곳의 성전지기가 와서 총독을 만나겠다고 했을 때 그의 아내가 일어난 듯 합니다. 그러나 이 시간은 너무 일렀습니다. 총독의 아내는 일찍 일어나는 법이 없었습니다. 잠결에 그는 자기 남편이 재판하고 있는 이 '의로운 사람'으로 인해서 많은 고통을 당했나 봅니다. 그의 부인으로부터 들은 말은 이미 난처한 입장에 빠져있는 그를 더욱 어렵게 해 주었습니다. 빌라도는 다시 나가서 물었습니다. "둘 중에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그는 아직도 무리들이 바라바 대신에 예수를 놓아 달라고 하지 않을까 해서 한가닥 희망을 품었습니다. 그는 또 한 번 오산했습니다. 관정에서 예수를 심문하고 있는 사이에 제사장들은 무리들을 선동해서 바라바를 놓아 달라고 할 것과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놓기를 요구하도록 해 두었던 것입니다. 이전보다 더욱 파렴치하게도 그들은 바라바를 놓아 달라고 떠들어 대었습니다.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그리스도라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이 질문은 지금까지 제기한 질문의 가장 중요한 대목입니다. 예수의 심문을 좌우하는 주축이었습니다. 모든 인류의 구원이 좌우되는 전환점이기도 했습니다. 빌라도의 질문에 그들은 한결 같이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겠나이다" 하고 외쳤습니다. 그 때 빌라도는 물었습니다.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저희가 더욱 소리 질러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일요일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 무리들은 그를 개선장군을 맞는 듯이 열광적으로 환영하였습니다.
그가 원하기만 하셨다면 이 세상에 어떠한 권력도 그의 등극을 방해 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가 지상의 정치적 왕이 될 의도가 전혀 없음을 선포하셨을 때 그의 인기는 급강하했습니다. 그의 친구들까지도 그를 버려두고 달아났습니다. 유다의 경우처럼 그들은 예수가 자기들의 호의를 배신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즉 왕국이 그에게 주어졌으나 그는 그것을 인수하기에는 너무도 약하고 겁이 많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사실이 그의 원수들에게 용기를 갖게 했습니다. 예수를 따르던 자들이 예수가 잡혀서 그의 원수들로부터 조롱을 당하는 것을 보았을 때 그들도 예수를 경멸하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일요일에 무리들이 예수를 왕으로 삼기 위해서 시끄럽게 떠들던 그 동기는 다음 금요일에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하고 외치게 한 동기와 꼭 마찬가지입니다. 군중들이 흥분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의 마음은 한결같이 예수를 죽이라고 외쳐댔습니다. 무리들의 수가 점점 늘어나자 난폭한 선동자들은 더욱 큰 소리로 떠들어대기 시작했습니다. 군중들은 더욱 거칠어졌습니다. 질서 정연한 법정에서 시작되었던 재판이 시끄러운 폭도들 가운데서 끝났습니다. 아직도 자기의 양심을 침해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무리들의 욕구불만을 해소시켜 주기 위한 방법으로 빌라도는 예수를 채찍질하고, 홍포를 입히며(조롱하는 뜻으로), 가시 면류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웠습니다. 그의 하속들은 조롱하기 시작했습니다.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 찌어다" 그들은 손으로 예수를 쳤습니다. 이 불쌍한 모습이 위선적인 제사장들의 마음을 녹여줄까 하는 헛된 희망을 지니고 빌라도는 다시 앞으로 나와서 말했습니다. "보라 내가 그를 너희에게 내어 주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음을 너희로 하여금 알게 하려 함이라" 바로 그를 따라서 예수가 끌려 나가셨습니다. 그는 가시 면류관을 쓰셨는데 핏방울이 그의 이마와 뒤 잔등에 흘러내렸습니다. 지난밤에 당한 고통으로 인해서 그는 기운이 하나도 없어 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에는 부드럽고도 위엄에 가득 찬 기운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가슴에 심한 충격을 받은 로마 총독은 무리들로부터 이 시골 죄수에게 돌아서면서 "이 사람을 보라!"고 말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의 원수들이 가슴속 깊이 간직하고 있던 악의를 몰랐습니다. 예수를 정죄한 제사장들을 만족시켜 주는 길은 사형 선고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계속하여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외쳤습니다. 빌라도는 "너희가 그를 데리고 가서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 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에 대한 항복이 아니었습니다. 이 말의 어조는 하나의 신랄한 야유였습니다. 빌라도는 그들이 자기네의 법으로는 예수를 처형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너희들이 그를 데리고 와서 재판을 의뢰했다. 이제 나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너희의 태도를 보니 나의 판결이 공정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니 너희가 그를 데리고 가서 너희 맘대로 재판하려무나" 라고 하는 말과 다름이 없습니다.
드디어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로마법에 의해서는 그를 정죄할 수가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이제는 자기들을 따르는 무리들이 대부분임을 알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저가 당연히 죽을 것은 저가 자기를 하나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 이제 그들은 예수를 사형에 처하려고 했던 사실상의 이유를 공개했습니다. 예수의 근엄한 자태와, 모든 백성들의 메시야 대망과 함께, 이러한 고소의 내용은 빌라도를 겁에 질리게 했습니다. "네가 어디서 왔느냐?" 그러나 예수는 대답하여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께 위협을 가해서라도 그의 대답을 들어 보려고 자기가 예수를 놓아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수도 있음을 상기시켰습니다. 예수는 "위에서 주시지 아니하셨다면 내가 이런 일을 행할 수도 없음"을 그에게 일러 주셨습니다. 이 말을 듣고 더욱 등골이 오싹해진 그는 예수를 놓아 주기 위해서 또 필사의 노력을 했습니다. 그래서 밖으로 나온 그는 물었습니다.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불과 한 주일 전에 그들은 예수를 왕으로 떠받들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대답했습니다.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이 사람을 놓으면 당신은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지극히 위선적인 발언이었습니다.
이렇게 음성적인 압력을 가함으로써 그들은 만일 총독이 예수를 놓아 주기만 한다면 로마 황제에게 이 사실을 고발할 것임을 상기시켰습니다. 조그마한 일로 큰 화를 당할 수 없습니다. 가이사에게 고소당한다는 것은 생각만 하여도 끔찍합니다. 그러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 주기 전에 그는 자기의 양심을 달래기 위해서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가로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책임이 없으니 너희가 알아서 하라"고 말했습니다. 시종일관 예수는 평정한 마음과 침착하고도 안정된 자세를 잃지 않으셨습니다. 반대로 그의 위엄 있는 태도가 재판관의 간담을 서늘케 할 정도였습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그는 혼자였습니다. 그의 추종자들은 모두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멸시하거나 또는 그를 박해하기까지 했습니다. 한 번도 예수는 그의 운명을 슬퍼하거나 마음의 평정을 잃으신 적이 없습니다. 자기의 손을 씻은 후에 빌라도는 악인 바라바를 놓아 주었습니다. "예수를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었습니다. 이리하여 불과 몇 시간 만에 역사상 최악의 부정 재판이 그 막을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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