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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3 .  죄의 유전(원죄론)에 대한 질문과 답변 (1)
  질문 : 2003-10-23
공과 15과 죄론 부분에서 죄의 유전이란 있을수 없는 것이며 영아는 순결한 존재라고 말씀하신 것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앞서 인용하신 롬3:23에 분명히 모든 사람이 범죄 하였다고 하셨음에도 영아가 무죄하다면 영아가 사망하는 것을 어떻게 보고 계시는 것인지요. 영아가 죽는것도 분명 죄값으로 주어지는 사망의 지배를 받기 때문인데 어떻게 영아가 무조하다고 하시는지요. 만약 영아가 죄가 없다면 결단코 영아는 죽을수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영아들이 죄를 알지도 못하는 가운데 죽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저는 롬 3:23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속에는 분명 영아도 포함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죄를 알지도 못하는 영아를 죄인이라고 하는 것이 무리라고 말씀하실수도 있으나 그 원리는 또한 히브리서 7:9-10의 말씀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레위는 멜기세덱을 결코 만난일이 없으나 성경은 레위도 그 조상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다고 말할수 있다고 하면서 그것은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칠때에 레위도 그 조상의 허리에 있어서 함께 참여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죄의 원리에 적용하면 영아를 비롯한 모든 사람은 아담의 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않았다 하더라도 아담이 범죄할 때 우리 모두가 그의 허리에 있어서 함께 죄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영아도 어쩔수 없이 죄인이라는 오명을 쓸수밖에 없다는 것이 제가 배운바 입니다.(칼빈의 기독교 강요, 박형룡박사의 조직신학 인죄론편 참조해 보세요)

그리고 죄의 결과에 대한 부분에서 그 마지막 즈음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살지 못하면 지옥갈것이라고 하신것도 또한 위험한 견해로 생각됩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 곧 그 백성으로 택하심을 받은자는 그 행위와 관계없이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구원을 얻는것이 틀림없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만약 내가 앞으로 행하는 어떤 일로 내게 주어진 하나님의 자녀라는 권세가 빼앗길수 있다면 롬8:25,38,39 말씀은 잘못된 것이 될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깨닫지 못하고 계속 죄악중에 살다가 죽은 영혼은 고전 5:5 말씀에 의하면 그의 결국은 사단에게 내어져 죽게 되더라도 그 영혼은 구원받게 될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께서도 요 6:37 등에서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으실 것을 말씀하신 것을 기억한다면 우리의 구원은 결코 행위에서 나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 지는 것임이 분명하다고 여겨집니다. 배우는 입장에서 너무 결례를 저지르는 것 같으나 그냥 넘어갈수 없는 부분이라 글을 드리는 것이니 만일 제가 잘못알고 있는 것이라면 고쳐주시기를 바랍니다. (최명용)
  답변 : 2003-10-24
최명용님께

"배우는 입장에서 너무 결례를 저지르는 것 같으나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부분이라 글을 드리는 것이니 만일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라면 고쳐주시기를 바랍니다."라는 자세는 겸양을 가지면서도 명확치 못한 부분은 두리뭉실 넘어갈 수 없다는 참으로 올바른 신앙의 자세로 받아드리면서 감사와 존경을 표합니다.

우리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경을 보는데 있어서는 자신의 눈보다는 "누가 이 말씀을 어떻게 보았는가?"를 먼저 염두 해 두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조심성 있는 자세여서 좋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하여서는 보다 더 조심스럽습니다. "이렇게 본 사람은 이단으로 정죄 받았으니 이렇게 봐서는 안 되는 것이로구나!" 하는 경계심을 전제로 합니다.

우리는 요한 칼빈이라는 사람이 약관 26세에 기독교 강요의 초판을 쓴 지혜와 용기, 역할을 결코 과소 평가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는 탁월한 신앙의 사람이요 비록 육체는 병약한 사람이었지만 그 영혼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고 활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기독교 강요는 23년을 거치면서 처음 6장(chapter)에 불과 했던 것이 80장으로 불어났고 당시의 상황에서는 대단한 반향(反響)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상황과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모두가 성경을 읽을 수 없는 암흑의 시대였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그의 기독교 강요조차도 처음에는 라틴어로 쓰여졌다고 알고 있습니다. 당시 유일하게 성경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은 종교 지도자들뿐이었습니다. 이런 상황하에서 '기독교 강요'는 당시에는 가히 '성경의 역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러한 영향으로 성경은 모든 사람들이 읽도록 계속해서 각 나라들의 언어로 번역되어졌고 오늘은 누구든지 원하기만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나의 말씀으로 들을 수 있는 복된 시기가 되었습니다.
저는 감히 '기독교 강요'를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율법을 지칭했던 것처럼 '몽학선생'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당시의 '기독교 강요'는 많은 영혼들을 교권주의에서 성경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시대에도 기독교 강요가 많은 사람들에게 존중되고 있는 이유는 '성경을 건전하게 이해하게 하는 지침서'로 인정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부분들은 이해시키려는 의도로 인하여 성경에 없는 용어들을 만들어 내기도 했고 당시의 신앙의 상황 때문에 강조된 부분도 없지 않습니다. 때문에 칼빈이 성경을 완벽하게 이해한 사람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오늘의 시대는 오히려 전제 없이(이 부분이 참으로 중요하다고 봅니다) 성경을 읽는다면 어떤 부분에서는 더욱 분명하게 성경을 이해할 수 있는 광명의 시대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역사를 뒤돌아보면 신학의 사상들이 수없이 논쟁을 겪어 온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논쟁 뒤에는 어느 한편은 정통으로 다른 한편은 이단으로 정죄 되어 온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영향들은 당연히 이단으로 정죄 되어진 사람들의 사상은 도외시하는 우를 범하게 됩니다. 그가 주장하는 대부분이 건전하지 못하다는 이유 때문에 그가 주장하는 옳은 것까지 매장되어 버렸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오늘도 그와 비슷하게만 말하면 "어 그것은 ‥‥ 주의인데" 라는 양극현상을 가져오게 됩니다. 우리는 어떤 훌륭한 사람들을 너무 존경한 나머지 그의 옳지 못한 가르침조차도 미화시키는 과도한 충성(?)을 가지고 있는 것도 경계되어야 할 신앙의 자세라고 봅니다. 설령 그가 잘못 가르친 부분이 있다면 그것을 바르게 발전시키고 보완하는 자세가 신앙에 있어서는 더 올바른 자세라고 이해됩니다.

성경과 일치되지 않는 부분이라도 '어느 누가 가르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그대로 수용해야 한다면 그것은 파당심(派黨心)이지 건전한 신앙심이라고 말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죄의 유전"을 가르치는 것처럼 이해되는 성경말씀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에스겔 18장(기도하시면서 음미해 보시는 것이 필요합니다) 같은 부분이 그런 부분입니다. 특히 아버지가 죄를 범했기 때문에 그 아들도 아버지와 동일한 취급을 받는다면 그것이 과연 "공의인가?" 묻고 싶습니다. 만약에 '죄의 유전'만이 진리라면 에스겔서 18장(사실 죄의 유전은 이스라엘에서도 속담이 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2~3절)은 성경에서 지워버려야만 합니다.

말씀하신 대로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이 아담의 죄 때문임을 증명하지 않으냐'고 하셨고 그런 입장에서 어린아이가 죽는 것도 그가 죄를 가지고 나기 때문이 아니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린아이의 무죄가 '죽지 않는 것으로 증명되어야 한다면'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된 사람도 육신이 죽지 않아야 일관된 주장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구원 속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도 죄의 문제는 해결 받았지만 역시 하나같이 이 지상에서 육신은 죽습니다.
바울은 이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롬5:14) 사람이 누구나 없이 죽는 것은 '아담의 범죄 때문'이지만 육신의 죽음이 의인된 사람들에게도 여전히 왕 노릇합니다. 그 이유를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기를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히9:27) 범죄 한 아담이후의 사람들이 예외 없이 죽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죽는 문제는 의와 불의의 기준이 되지 못합니다.

어린아이들이 죄가 있다는 사실을 히7:9~10의 말씀으로 이해하셨는데 인용하신 내용은 이 과제와는 적절치 못한 비유라고 생각하며 로마서에서 바울은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롬5:13)고 선언함으로써 죄를 죄로 인식하지 못하는 입장에서는 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는데 이것을 어린아이들에 관련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

로마서 3:23의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셨던 본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잃어 버렸습니다.-공동] 우리 시대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말씀을 마치 "모든 사람이 '죄를 유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라고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까지도 우리 나라에는 "연좌제(連坐制)"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쉽게 말하면 그 가족이나 부모가 이적단체(대표적인 예로 북한)에 기여한 과거를 가지면 어떤 범죄들이 함께 처벌되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법안이 폐지되었습니다. 왜 입니까? 이적단체에 기여한 가족과 지금의 가족은 전혀 관련을 갖지 않기 때문에 그 법률은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법보다도 월등한 하늘의 법에 의해 사는 오늘의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 '연좌제'에서 아직도 자유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내가 형벌을 당한다면 그것은 아담의 죄 때문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 범죄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잘못되면 조상 탓, 잘되면 자신 탓'이라는 속담처럼 오늘 나의 범죄를 조상에게 전가해서는 안되며 그것이 바로 죄의 속성일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신앙의 논리들은 원죄라는 신앙적 전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원죄를 인정하게 되면 거기에 따라 오는 많은 비 성서적인 부분들이 역시 수용되어야만 합니다.

예를 들어 '절대 예정'이라는 부분도 역시 원죄와 관련이 되는데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나기도 전에 "너는 구원이다, 너는 지옥에 버린다"고 이미 정하셨다면 어떻게 나중에 버림을 받은 사람들에게 죄를 물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을 단순히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인간은 피조물이기 때문"이라고 밀어붙이는 것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격하시키는 생각입니다.

물론 여기에도 그렇게 이해하게 하는 성경 말씀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반대의 입장에서 죄에 있는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의지를 더욱 강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어찌 '악인'의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서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겔18:23)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겔33:11)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6:40)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롬1:16)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롬10:11)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느니라"(고전8:3)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2:4)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9)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어찌 이 지면에 다 열거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서 "누구든지", "모든 사람", 믿는 자" 등등이 다 하나님의 구원하기로 예정하신 사람들일까요? 더욱 극단적으로 말해서 하나님은 구원받을 사람은 이미 다 정해 놓으시고 겉으로는 "누구든지 믿기만 하라!"고 능청을 부리시는 걸까요? 제가 믿기로는 하나님은 절대로 그러실 수 없는 분이시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아담이후부터 주님의 다시 오심의 때까지 이 세상에 존재할 모든 사람들의 됨됨이를 모두 아신다고 믿습니다. 로마서 8:29 바울은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인간 모두의 됨됨이를 이미 다 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각 사람은 자신의 성품과 의지에 따라 운명이 결정된다는 사실입니다. 가룟 유다는 하나님께서 그 성품대로 그 역할을 하게 하신 것이지 하나님께서 "너는 세상에 나가서 예수를 팔고 목매달아 죽어라"고 그의 운명을 결정지어 보내신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논리들은 인간의 의지가 그대로 인정되면서도 하나님의 권위에 손상을 가져오지 않는다고 믿어집니다.

요6:37의 말씀은 불신하는 유대인들을 향해서 하신 말씀이고 연이어지는 말씀을 보신다면 그들도 주님을 영접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40절을 보면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입니다.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쉽게 지나쳐서 안 될 사실은 죄인 된 인간 스스로가 하나님을 찾아 섬길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초청이나 성령의 감화하심이 없이는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범죄한 인간의 어떠한 의로운 행위로도 구원받을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구원의 견고성에 대해 인용하신 롬8:25, 38~39의 말씀은 너무나 확고한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여러 부분에서는 하나님의 의지와는 반대로 주님께 왔던 사람들이 구원을 상실할 위험성도 경계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히브리서 6:1~8 벧후2:20~22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견고치 못해서가 아니라 사악한 인간의 죄성 때문에 구원을 내팽개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가하면 야고보는 구원받지 못할 죽은 믿음에 대해서도 경계합니다. 야고보서2:14~26에서 (14)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7)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20)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22)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24)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26)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뿐만 아니라 바울은 빌2:12에서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경계합니다.

역시 계시록의 일곱 교회들에게 보내는 서신에서도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2:5)는 에베소 교회를 필두로 범죄 한 교회마다 같은 경고가 주어지고 있음을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하겠습니까?

무엇보다도 주님께서 이 지상에 계실 때에 경계하신 말씀을 교훈 삼아야 할 것입니다.(마7:21~23)

"만일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라면 고쳐주시기를 바랍니다."라는 최명용님의 진리에 대한 갈증이 채워지실 수 있었으면 더욱 감사하겠습니다. 질문하신 내용은 참으로 오랜 기간동안 많은 사람들 속에서 논쟁되어 온 사실입니다. 그러나 진리는 복잡한 것이 아니고 단순한 것이라 확신합니다. 다만 그 진리를 수용하는데 문제가 더 귀하다고 확신합니다.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죽을 사람은 죄를 지은 장본인이다. 아들이 아비의 죄를 받거나 아비가 아들의 죄를 받거나 하지는 않는다. 바로 살면 바로 산 보수를 받고 못된 행실을 하면 못된 행실의 보수를 받는다.-공동]"(겔18:20)

주님의 평강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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