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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하나님께서 왜 세상을 창조하셨을까요?
  질문 : 2003-10-23
대학철학 수업을 듣고 있는 학생입니다.

저희 수업은 교재,즉 철학자들의 주장에 대해서 자기생각을 가지고 비판하는 방식으로 취하는 발표식 수업입니다. 제가 이번에 중세철학자들의 내용을 맞게 되었는데, 제 짧은 소견으로는 결론이 나지 않아서 의견을 부탁드립니다.

첫번째, 주제가 <왜 신이 세계를 창조하였는가?> 입니다. 교재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보면

일반적으로 신이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고 인간이 신을 기리게 하기 위하여 인간을 창조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다소 비논리적으로 여겨진다. 신이 완벽하고 절대적인 존재라면, 위와같은 혀영기어린 약한 모습을 드러낼것인가? 다른한편 세계는 매우 불안정하고 세상에는 번죄가 창궐하고 있다. 세상에 악이 존재한다는 것은, 가장 널리 퍼져 있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려는 주장이다. 신이 존재한다면, 세상의 모든 악을 가만히 놔두지 않을 것이며, 범죄를 반드시 철결할 것이기 때문이다. - 중략- (성토마스의 의견을 제시한 후에 기독교의 입장을 말하였습니다.)신은 무한히 사랑할 수 있으므로, 선을 위해 일할 수 있는 다른 존재들을 원했다. 신은 스스로 닫혀있거나 자신의 완벽성만을 추구하지 않으므로, 또다른 존재들을 잉태하려는 사랑과 욕망으로 충만한 절대적인 존재이다. (중략)

하나님은 왜 이 세계를 창조하셨나요? 제 생각에는 신이 인간을 창조함으로써, 인간이 신께 감사하고 그럼으로 인하여 영광을 드러낸다고 생각하거든요. 확실하게 하나님의 영과을 드러낸다는 것은 무얼의미하나요? 그런데, 하나님 영광은 구체적으로 무얼 나타내는 것이지요? 그리고 왜 하나님은 이세상에서 악을 제하시지 않나요? 쭉정이와 알곡을 구별하기 위해서?

인간에게 왜 자유의지를 주셨을까요? 그냥 하나님만 바라보고 선한것만 믿게 하셨다면, 모두 하나님의 자녀로써 행복한 삶을 누리지 않았을까요? 또 하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었다 하는데, 그 형상이란 도대체 무엇인가요?

둘째 주제가 <악의 원인>입니다.
필자는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은 선과 악사이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이고,그렇기때문에 악이 필연적으로 존재해야하는 것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교재의 내용을 계속해서 이야기해보면---
진정한 악이란 육체적으로 고통받거나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도덕적인 악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순수한 마음만 가지고 있으면, 아마도 영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때문이다. 이 세계는 거쳐가는 곳에 불과하며, 진정한 행복은 다른 세계에 있다. 이 세상은 영원한 삶과 신의 긍휼에 값하는 자들을 가려내기 위한 시련의 장소이다. 그렇지 않으면, 삶이란 불가능한 것이다. 이 세상은 인간이 만드는 대로 될 것이다. 게다가 신은 항상 정의의 승리를 위해 인간세상에 개입하는 것을 즐기지 않는다. 신의 현존의 표시가 너무 빛나기때문에 인간은 신을 행하고 그의 법을 따르는데 아무런 의미와 가치를 느끼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신의 빛나는 현존으로 인하여 인간은 사랑이 아니라 두려움과 이해 관계로 선을 행할 것이다. 성토마스에 따르면, 신은 일단 세계를 창조한 후, 신의 영감을 받은 선지자들의 입을 통해 그리고 그리스도의 형태로 육화되어 나타나면서 그의 기다림을 인간에게 알리는데 자신의 행동을 국한시킨다. ---
악은 왜 존재하는 것이지요? 또 진정한 악이란 무엇인가요? 왜 신은 드러나게 개입해서 처벌하지 않나요? 또 진정한 행복이란 과연 무엇인가요? 그리고 신은 단지 그 기다림은 인간에게 알리는데 자신의 행동을 국한시키나요?

세번째 주제는 <법과 믿음에 의한 행복>입니다.
교제 내용을 살펴보면 ----신의 율법은 많은 욕망의 충족을 금지시킴으로써 행복을 빼앗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겉보기에 불과하다. -중략-그리하여 인간은 채울수 없는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고, 대자연의 아름다움과 살아있음 그 자체라는 경이로운 선물에 경탄하면서, 에피쿠로스의 현자처럼 매우 적은 것에 만족하고 단순한 것에 기쁨을 느끼는 법을 배운다.신의 메세지를 듣고 이해한 사람,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을 깨닫고 신을 사랑하는 사람, 신의 피조물을 사랑하면서 그가 신의 창조적인 작업에 참여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신에게서 받는 힘은 무엇인가? 영원한 삶에 대한 희망은 지상에서의 삶의 비참함을 상대화하는가? 우주의 목적성에 대한 확실한 이해, 나의 나약함을 용서해주는 창조주의 선함에 대한 믿음, 나라는 존재의 본질적인 운명에 대한 자각등은 삶의 우여곡절을 가벼운 마음으로 견디게 할 에너지를 주지 않는가?----
왜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 인간의 삶을 제약하셨나요?
우리는 절대선에 이르기 위해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나요? 구체적으로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 답해주십시오.

사실 교재의 내용을 읽다보면 그럴 듯 하게 보일때도 많습니다. 저의 확고한 가치관이 성립되지 않았기때문이겠지요. 제가 쓴 교재의 내용이 왜 틀렸는지 구체적으로 지적하여 주십시오. 설명하실때에 구체적인 예를 사용하여주신다면, 제가 좀더 이해를 빠르게 할 수 있을 것같내요. 꼬~옥 답변 부탁드립니다. (미숙)
  답변 : 2003-10-24
솔직한 질문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질문의 범위가 대단히 넓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희 웹사이트는 수업 과제를 해결해 주기 위한 답변은 해드릴 수 없다는 것과 철학적인 논리를 가지고 답해 드릴 수도 없다는 것을 먼저 전제하고 답변을 드릴까 합니다. 물론 인용하신 철학 교과서의 내용도 신앙적으로는 수용할 수 없는 내용임을 밝힙니다.

지금 중세 철학을 공부하고 계시다고 하셨는데 철학(哲學)은 우리말로는 인생의 밝은 것을 학문한다고 말하지만 본래는 "philosophy<필로쏘피>" 즉 '지혜를 사랑한다'는 희랍어의 "philos<필로스> 사랑(우정으로서의)"과 + "sophia<쏘피아> 지혜"가 합쳐진 말이라는 것을 님께서도 잘 아실 것입니다.

철학은 그 말에서 의미하는 것처럼 단지 유한한 인간이 '지혜를 사랑하는 것'뿐입니다. 철학이란 매력적인 주제만큼 우리의 삶에 빛을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일관성이 없습니다. 한 마디로 엎치락뒤치락입니다.

왜 그렇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기준 자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rogos 聖經)에 바탕을 두고 있는 반면에 철학은 인간 이성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중요시하는 관점에 의해서 철학의 기준이 신이 중심이 되기도 하고 사람이 중심이 되기도 하다가 또다시 자연이 중심이 되는 순환적 사상을 역사의 흐름에 따라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철학이란 인생에 궁극적인 해답이 되지 못합니다.


.왜 신이 세계를 창조하였는가? 에 대하여
죄진 인간은 아무리 고상하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위치에서는 지고지선(至高至善)의 하나님을 절대로 바로 인식하지 못합니다. 양심(良心)도 그렇거니와 인간의 이성(理性)이 제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사죄의 은혜를 받은 후라야 가능합니다. 그래서 이성은 반드시 신앙에 종속된 이성이라야 비로소 바른 판단의 기준을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첫째 질문인 하나님께서 왜 세계와 사람을 지으셨느냐고 묻는 것은 도예가(陶藝家)에게 왜 도자기를 만드느냐는 질문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아름다운 교제를 위하여 사람을 지으심에 어찌 피조물이 왜 이런 것들을 만들었느냐고 질문할 수 없는 그야말로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입니다.

바울 사도께서 일찍이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롬 9:20~21)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구약성경의 이사야가 말하기를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하였고

바울 사도는 아테네의 에피큐리안과 스토익 철학자들을 향하여 이를 설파한바 있습니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행 17:24~27)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무엇이 부족하여 인간이나 자연으로부터 섬김을 받으실 필요가 없으신 자존적인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 그것은 사랑의 자의적 행위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부분을 너무 무게 있게만 다루려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이 인생의 과제로 삶는 '하나님께 영광'은 단순히 인간이 '하나님을 창조주와 구세주로 고백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자신의 삶을 의탁하고 의논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한 이 논리가 참으로 사람들의 삶 속에서 어려움을 느낍니다.

예수께서는 지상에 육신으로 계시며 행하신 모든 이적과 기적 그리고 착한 일들을 자신의 힘이나 능력으로 하신 것처럼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 모든 것은 하나님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마찬가지로 올바른 그리스도인은 모든 착한 행실이 자신이 행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 속에 친히 임마누엘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라고 겸손하게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함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였다.'(요 5:44)고 주님께서 책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악을 묵인하시는가?' 하셨는데 그것은 묵인이 아닙니다. 다만 심판이 연기된 것에 불과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만약에 하나님께서 즉각, 즉각 심판하셔서 범죄 하는 사람들을 당장에 형벌 하신다면 과연 이 땅에 사람이 남아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인간들이 도덕적이나 윤리적인 기준을 가지고 죄가 크다 적다 할뿐이지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 선언하셨기 때문에 범죄 하는 사람이 당장에 모두 죽음으로 심판을 받는다면 이 지구상에 인류가 계속적으로 존재할 수 있을까 의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선언합니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행17:30~31)

'하나님만 바라보고 선한 것만 믿게 하셨다면, 모두 하나님의 자녀로써 행복한 삶을 누리지 않았을까?' 하셨지만 과연 그럴까요? 완벽하게 프로그램화된 기계 같은 인간에게 과연 행복이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은 악의 조장자(助長者)가 아니시며 창조자도 아니십니다. 다만 반역한 일련의 천사들에 의해서 불순종과 죄, 그리고 악은 있게 되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저희 홈페이지 게시판 21번의 "사단의 기원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그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인간의 몸으로 이 죄악의 세상에 친히 오셨고 인류의 죄를 해결하기 위하여 친히 자신의 생명을 제물로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의 초청에 응할 수 있도록 기다리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8~9)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질문은 우리의 외형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내적인 것들을 말합니다. 사람들이 비록 범죄 하기는 했지만 종교성을 갖는 것 같은 것은 비록 일그러지기는 했어도 바로 하나님의 형상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동물은 아무리 사람과 가장 비슷하게 생겼거나 지능이 높은 것도 절대로 자신에게서 '신과 교제'하고자 하는 종교성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 밖에도 양심이나 도덕적인 성향 같은 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형상성의 부분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로 인하여 무디어진 양심이나 도덕은 더 이상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Ⅱ.악의 원인과 관련된 질문에 대하여
악과 선의 선택이라는 말씀은 좀 모순이 있습니다. 결과적이고 사회적인 용어에서는 그렇게 표현할 수 있겠지만 엄밀히 성서적으로 말하면 인간에게는 악과 선을 선택할 기회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에덴 동산에서부터 '순종과 불순종'의 선택이 있을 뿐입니다.

또 성경이 말하는 "악"이 무엇이고 "죄"가 무엇인가를 바로 정의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패역이 너를 책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렘2:19)고 선언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악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이해하게 됩니다.

다시 예수님께서는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요 8:24) 하셨고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요 16:9) 라고 말씀 하셨는데 에덴의 불순종을 해결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요 마지막 방법은 하나님께서 해결책으로 주신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십자가와 부활과 심판을 믿는 것입니다.

조금은 독선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이것은 우리 인류에게 마지막으로 주신 하나님의 구원의 초청입니다. 함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거절해 버리면 그러한 사람은 당연히 죄 가운데 그대로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기다리는 것으로 행동을 국한시키시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인간을 초청하십니다.

이것을 우리는 "계시(啓示)" 라고 하며 약 6,000년 동안 계속되었고 지금도 주님은 죄에 있는 인류를 초청하고 계시며 이 하나님의 초청에 응답하여 십자가의 피로 죄를 씻음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는 것이 바로 인간의 궁극적인 행복입니다.

사람들은 물질이 풍부하고 부족함이 없어도 왜 불안해하고 만족하지 못합니까? 그것은 죽음의 공포 때문이며 다시 죽음은 죄와 연결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죄의 어두움을 걷어버리는 것이 인생의 행복의 근본적인 조건이며 가장 중요한 과제입니다.

일찍이 다윗이 이를 고백했고 바울도 여기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2)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 4:6~8)

모든 불행과 공포의 원인은 죄 때문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니라"(잠 28:1) 고 솔로몬이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인생의 행복의 방법 그것은 죄를 용서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용서받는 것, 그것이 어쩌면 우리 일생에 가장 중요한 과제이며 인생은 이것을 위해서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죄의 용서 그것은 인간 스스로는 불가능한 하나님께서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이요, 사죄를 확신하는 것 그것은 오늘 죽어도 영원이 보장되기 때문에 인생의 성공자요 아무리 부요하게 오래 살아도 죄의 문제를 해결치 못하면 인생의 실패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마지막 초청에 응답해야 하는 것입니다.

Ⅲ.법과 믿음에 의한 행복에 대하여
"법과 믿음에 의한 행복"은 앞에서 이미 답변이 되었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 인간의 삶을 제약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분의 말씀을 주신 것은 오히려 '제약'보다는 자유를 위해서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1~32)

인간이 절대 선에 이르는 방법은 인간의 방법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와 사랑의 법을 순종하기만 하면 됩니다.

엄밀하게 말씀드리면 우리 인간 편에서는 해야 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사 55:1~3)

다시 주님의 초청에 귀를 기울입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해야 행복할 것이라고 지래 짐작합니다. 그러나 아시는 대로 사람에게 가장 귀중한 것은 값이 없습니다.

공기, 물, 모두가 하나님께서 거저 주신 것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값을 매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도 값을 매길 수 없고 아니, 이미 하나님께서 지불하셨기 때문에 거저 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2:8~9)

왜 예수 믿는 자들이 예수를 전합니까?
그것은 자신이 누리는 행복을 다른 사람에게도 끼쳐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또 그런 의도가 아니라면 복음증거의 의미는 호소력이 없습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산에서 복음으로 인하여 행복한 한 사람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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