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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력의 원천
  연구과 (산상설교) - 7 과
예배는 신자의 생활에 있어 중요한 몫을 차지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면 그의 능력은 말라버리고 말 것이 분명합니다. 예배시간에 참석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영적 능력이 말라서 점점 나약해질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당하게 예배를 드리는 자도 이러한 능력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산상설교의 다음 부분에서 예수는 바리새인들의 위선적인 예배의 형태에 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바리새인들의 위선과 기만적인 태도를 과거에 여러 번 책망하셨을 뿐 아니라 특히 그들의 이중적인 가치 기준과 율법적인 전통을 개탄하셨습니다. 거짓 예배를 드린 자들에게 그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 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마 15:7-9)

◑ 연극적인 예배
마태복음 6장 첫 절은 예수가 직접 눈으로 목격하신 위선적 예배의 형태에 대한 그의 근본적인 비판을 소개합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마 6:1)
예수의 비판은 바리새인들이 드린 예배의 동기에 관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드리는 예배의 동기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그러한 동기 가운데 몇 가지의 불순성을 지적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배를 마치 미신적인 의식이나 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들은 자기가 부르는 노래나 행위의 뜻을 전혀 알지 못하고 예배에 참석합니다. 그들의 예배는 기계적인 힌두교의 예배의식과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러한 사람의 예배행위는 행운을 빌기 위해서 문 위에 말의 편자를 못으로 박아두는 것과 같은 태도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의 경우처럼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예배를 드립니다. '보이려고' 하는 구절은 희랍어 연극에서 나왔습니다. 단순히 사람들에게 보일 목적으로 자동차를 사고, 주택을 사고, 혹은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연극적 효과를 위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의 의상을 남에게 전시하거나, 교회 건물의 큰 것을 자랑합니다. 그래서 이웃사람에게 한번 우쭐해지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드리는 예배는 영적으로 어떠한 축복도 받을 수가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불행스럽게도 '사람 앞에서 보이려고' 예배를 드리는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자기의 행위를 합리화시키려는 인간의 습성으로 인해 그들은 자기가 드리는 예배의 동기를 미화시킵니다. 합리화란 것은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해놓고 거기에 적당한 핑계를 붙이는 행위를 말합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모든 사람이 이러한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공부는 하지 않고 밤이 늦도록 텔레비전만 시청하고 있는 학생도 이렇게 변명할 것입니다. '공부만 하고 놀지 않으면 머리가 둔해지거든요'.

'자기합리화'의 습성을 고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가급적이면 스스로가 정직해지는 것입니다. 세리는 자기가 죄인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예배행위는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행위입니다.

한편 바리새인은 다른 사람에게 자기가 얼마나 착한 사람인지를 알게 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동기를 합리와 시킬 목적으로 사용한 것이 그들의 기도입니다. 예수가 바리새인의 성실성 여부를 묻지 않으셨다는 점을 유의하십시오. 그의 성실성은 거의 완전에 가까웠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의 동기가 나빴기 때문에 그 예배도 위선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든 교회의 신자들은 자기 합리화의 습성으로 인해서 미화된 자기의 나쁜 동기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목사도 자기의 행위를 합리화시킵니다. 어머니의 역할이 귀찮아서 보모에게 자기의 어린 아기를 맡기고 사회활동에 참여할 때에도 그는 "돈벌기 위해서" 라고 하는 명분을 내세웁니다. 자기의 "의"를 남에게 나타내지 않기 위해 도덕적 판단에 있어 뚜렷한 입장을 밝히지 않음으로 자기의 행위를 합리화시키는 남자들이 있습니다. 실상 이유는 엉뚱한 곳에 있으면서도 설교가 마음에 들지 않아 예배시간에 참석치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는 올바른 예배를 통해 영적 능력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너의 아버지로부터의 상급'은 진정한 예배자만이 알고 있는 영적 능력을 의미합니다. 아무 생각도 없이 예배시간에 참석하는 사람은 결코 예수의 교훈을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는 다음의 세 가지 형태를 분류하셨습니다. 구제, 금식 및 기도입니다. 이 세 가지 공부를 통해서 참된 예배 자에게 주어지는 상급의 뜻을 배울 수가 있을 것입니다.

◑ 구제
어떤 사람들은 구제를 참된 예배로서가 아니라 단순히 종교적 의무의 하나로 생각합니다. 예수는 적절한 구제행위를 통해서 영적 축복을 받을 수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또한 아무런 영적 능력을 얻지 못하는 위선적 구제행위에 관해서도 언급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 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마 6:2-4)

구제는 유대 종교에 있어서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율법주의 적인 바리새인들에게 있어 십일조 헌금은 하나님의 종교적 행사로서 행운의 부적으로 삼기까지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구제의 형식으로 고행을 감수했습니다. 대체로 그들이 행하는 구제란 물을 담은 가죽부대를 사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 있습니다. 팔레스틴에는 물이 귀해서 여간 애를 쓰지 않고는 물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길거리에서 물을 파는 사람들이 생겨나기까지 했습니다. 돈 많은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위해 물이든 가죽부대를 사면 물장사는 이렇게 외치면서 나팔을 불었습니다. '목마른 자들아 여기 와서 물을 마셔라' 이러한 은혜에 보답하는 뜻으로 가난한 사람은 구제를 베푼 부자에게 이와 같이 말합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죄를 용서하시길 빕니다. 물을 주신 분이' 이러한 형태의 구제를 통해서 구제를 베푸는 사람은 자기를 선전할 뿐 아니라 또 죄의 용서를 받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는 이러한 사람들은 이미 그들의 상급을 받은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상급은 감사와 아첨의 언사로 인해서 얻어진 기쁨입니다. 그들의 상급은 사람들에게서 얻어진 것이요,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영적 은사는 아닙니다.

이러한 종류의 구제가 오늘날에 있어서도 많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타인에 의해서 공개될 구제행위가 아니면 어떠한 선행도 베풀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이름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거나 자기의 이름이 붙은 건물을 소유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그들의 상급입니다.

예수는 명예나 영광이 부도덕한 것이라고 하신 적은 없습니다. 다만 이런 것들이 예배의 동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경고입니다. "너의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고 하신 예수의 말씀은 구제를 남이 모르게 해야 될 뿐 아니라 스스로도 몰라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시기 위함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의 선을 공중 앞에 나타내지 않으려고 하면서도 자기만은 그 일을 기억하고 있으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남이 모르게 구제하면 더 큰 상급이 자기한테 주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자기의 고차적인 선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예수에게 있어 이것은 참된 예배의 정신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너의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예수의 성품 속에 익살스러운 감각이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는 무엇을 말씀하려고 하신 것일까요? 여기 두 가지의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사람이 구제를 해야 할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그는 자기의 능력에 따라서 구제를 해야 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 이상은 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능력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구제를 합니다. 그는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어서 그것을 근심스럽게 세어봅니다. 그러자면 왼손의 협력이 없이는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때에 왼손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알게 됩니다.

두 번째의 경우를 소개합니다. 어떤 사람이 어린이가 앓게 되어 약을 먹이게 되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 때 그가 어린이에게 베푸는 도움의 동기가 어떠한 것일까요? 분명히 그것은 자식에 대한 사랑일 것입니다. 어린이를 위해 돈이 필요하게 되면 그 아버지는 호주머니 속에 든 것을 전부 끄집어냅니다. 그는 자기의 분수에 맞도록 돈을 꺼내야 한다고 생각지를 않습니다. 만일 왼손을 사용했다면 그것은 다른 쪽 호주머니에도 돈이 들어 있는지를 조사하기 위해서 일 것입니다. 이것이 부성애(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이러한 태도야말로 구제를 통한 예배행위의 참된 동기가 될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가끔 이런 권면을 듣습니다. 손해가 될 때까지 구제하십시오. 이 말은 우리가 구제행위로 인해 은사를 받기 전에 실제로 베풀 수 있다고 믿는 것보다 더 많은 구제를 해야 한다는 확신에 의해서 나올 것입니다.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손해가 될 때까지 베푸는 구제가 아니라 "필요가 없을 때까지 베푸는 구제"를 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부모들은 그들의 자녀에게 맹목적으로 구제를 강요함으로서 불행스러운 과오를 범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비록 그들의 동기는 성실할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구제의 외적행위가 결과적으로 불쌍한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까지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예수는 이것이 그럴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의 소유를 남에게 주고 싶어질 만큼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어린이들로 하여금 다른 나라의 어린이들을 위해 헌금을 해야 하는 것이 그들의 의무라고 주장하기 전에 먼저 외국의 어린이들을 그들이 사랑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 금식
흔히 예배행위의 항목을 이야기 할 때 금식을 빠트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예배행위의 하나로 금식을 소개하시고 그로 인해 주어지는 능력 또한 알고 계셨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는 올바른 금식의 태도를 가르치셨을 뿐 아니라 스스로 금식을 행하셨습니다.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금식 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6:16-18)

유대인들은 일정한 기간동안 자발적으로 음식을 먹지 않았습니다. 금식의 이유가 두 가지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의 의식으로서, 혹은 자기의 신앙이 독실함을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금식을 했습니다. 여기에는 은밀한 것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들의 더러운 얼굴과 고통스러운 표정에 의해 다른 사람이 그들의 금식을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음식을 전폐하는 일은 없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바리새인들과 비슷한 방식으로 남에게 자랑하기 위한 금식을 하고 있습니다. 나이 든 전도자가 그의 교인들에게 나는 늙어서 죽을 때까지 일을 한다고 하는 인상을 줄려고 은연중에 애를 쓴다면 이것은 현대판 금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가정주부가 괴로운 안색을 하면서 막중한 가사로 인해 자기가 얼마나 피곤한지, 또 휴식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강조함으로 타인으로부터 동정을 구하려고 애쓰는 데 많은 시간을 소비해 버린다면 이것도 현대판 '금식'의 하나일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은 그들의 상을 받아 버린 거나 다름이 없습니다.

금식의 두 번째 동기는 그것이 오랜 명상의 시간을 갖게 해준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가 행하신 금식의 태도입니다. 그가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에 40일간 금식을 하셨습니다. 영적 결단의 시기에 처했을 때 그는 금식을 통해 새로운 능력을 얻었습니다. 그에게는 외적행위를 통한 의식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있어 금식은 보다 높은 가치에 대한 관심의 표현이었습니다. 예수는 금식을 의식의 하나로 만드는 일에 반대하셨습니다. 사실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유대교 의식을 무시했을 뿐만 아니라 또 거기에 준엄한 비판을 가하기까지 했습니다.

예수가 40일간 광야에 나가셨을 때 그는 자기의 사명과 장차 주어질 도전에 관해 깊이 명상하셨습니다. 그래서 그가 식사에의 유혹을 받으셨지만 실상 그것은 별로 중요한 문젯거리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가 세속적 욕구를 가볍게 무시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교차적 가치에 대한 헌신 때문이었습니다. 타인의 일을 도우느라 식사할 틈도 갖지 못한 사람만이 금식에 의한 영적 은사를 받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병석에 누운 딸을 간호하는 아버지는 자기의 신상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돌보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의 어린이들을 위해 며칠동안 식음을 전폐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근심에 빠진 아버지가 얼마든지 있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의 병상을 지켜보고 있는 부모에게 있어서는 음식뿐만 아니라 모든 선물이 무의미 할 것입니다. 따라서 금식은 부성애의 특징 가운데 하나임을 알 수 있겠습니다.

설교준비를 위해서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전도자야말로 금식을 통해 주어지는 영력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의 사명 때문에 자기의 신변을 돌보지 않고 또 사명에의 헌신으로 인해 능력을 얻는 사람이야말로 금식에 의한 능력을 체험할 것입니다.

예수가 가르치신 바와 같이 참된 예배는 외적형식이 아니라, 내적 태도에 더 중요한 가치를 부여합니다. 예배의 동기를 성화시킴으로 우리는 장차 주어질 고난을 극복 할 수 있는 영적 능력을 체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배의 참된 정신을 이해하는 사람만이 그가 영적 능력의 소유자임을 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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